1. 한글날과 한글, 그리고 한국어
한글날은 1926년 조선어학회에서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고 하여 기념하면서 시작되었고, ‘한글날’이라는 명칭은 1928년부터 사용되었다. 10월 9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면서부터인데 훈민정음의 창제일이 아니라 반포일을 기준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여 ‘영어보다 우수한 한글’이라든지 아니면 ‘한국어도 쓸 줄 모르는 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한국어를 적는 문자인 한글이 한국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니 대유법이 사용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문자인 한글과 언어인 한국어는 지칭하는 바가 다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뜻은 <훈민정음>(1446)의 서문에 나와 있듯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함을 어여삐 여겨서’이다. 이 말은 훈민정음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글자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로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를 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배층의 문자는 한자였으며, 피지배층 그리고 아녀자의 문자는 훈민정음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이 피지배층과 글로 의사소통하려면 한글을 써야 했으니 지배층이 한글을 몰라서도 안 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모든 백성이 한글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한국어의 보전을 용이하게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용비어천가>(1445), <석보상절>(1447), <월인천강지곡>(1449)과 같은 작품이 나왔고, 불경과 유교 경전, 의학서, 역학서, 두보의 시도 한국어로 언해가 되었으며, 가사, 시조, 고전소설 등 한글 문학작품이 등장하여 중세한국어와 근대한국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한글은 한국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2. 언어 정책과 한글 전용, 국어 순화
세종대왕 당시에 언어 정책이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경서를 언해하고 <동국정운>을 편찬한 것은 모두 국가에서 주관한 언어 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정책(Language Policy)은 국가가 주도하는, 언어와 관련한 각종 계획으로 민간에서 주도하는 언어 운동(Language Movement)과 함께 언어 계획(Language Planning)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언어 정책의 주요 논제는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으로 대립되는 문자 정책과 효과적인 언어생활을 저해하는 국어 요소를 제거하는 국어 순화(醇化)로 요약될 수 있다.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만 쓰자는 한글 전용 운동은 광복과 함께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한글 전용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한글 전용법’은 사회 상황에 앞선 법률로 실효를 크게 거두지 못하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에 만들어진 한글 전용 5개년 계획을 앞당겨 한글 전용을 권장하는 7개 항목의 지시를 내각에 내려 한글 전용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한자 폐지 반대론자들은 1969년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를 창립하여 한글 전용이 시기상조이며 한자 교육을 부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 속에 한글 전용 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며 자연스레 인쇄물에는 한글이 주로 사용되었고 1988년에는 순한글 신문인 한겨레가 창간되기에 이른다.
한글 전용은 필연적으로 국어 순화를 전제로 한다. 동음이의어가 많은 한자어의 사용을 줄이고 한자를 보지 않고도 뜻을 알 수 있는 어휘가 사용되어야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어 순화는 외래어나 외국어, 또는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어 사용하고자 하는 국어 순화(純化, Purification)와 은어, 속어, 비어 등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미화(美化, Beautification)로 나눌 수 있다.(북한에서는 ‘순화’라는 한자어 대신 ‘말 다듬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외래어적 요소를 고유어로 바꾸는 국어 순화는 1910년대의 주시경 선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주시경 선생은 명사, 동사 대신 ‘임, 움’ 등의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훈민정음’ 대신에 ‘한글’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주시경의 이러한 정신은 제자 최현배로 이어졌으며 그는 ‘문법’이라는 말 대신 ‘말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48년 광복 후 문교부에서는 ‘우리말 도로 찾기’란 소책자를 펴내 식민지 시대의 일본어 잔재를 일소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62년에는 한글 전용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된 ‘한글 전용 특별심의회’에 일반 용어, 언어 문학, 법률 제도, 경제 금융, 예술, 과학 기술의 6개 분과위원회를 두어 한자어로 된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국어 순화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어 순화를 내각에 지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문교부에 ‘국어 순화 운동 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심의 기구인 국어심의회 안에 ‘국어 순화 분과위원회’가 신설되어 <국어 순화 자료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3. 오늘날의 한국어
국어 순화의 대상이 되었던 어휘는 기원에 따라 일본어, 일본식 한자어, 어려운 한자어, 서구어로 나눌 수 있다.
(일본어의 예) 가라→가짜 기스→흠 와사비→고추냉이 사라→접시 나시→민소매 시마이→마감
(일본식 한자어) 사양서(仕樣書)→설명서 시건(施鍵) 장치→잠금 장치 거래선(去來先)→거래처
(어려운 한자어) 비산(飛散) 먼지 주의→날림 먼지 주의 콘크리트 양생(養生) 중→콘크리트 굳히는 중 촉수(觸手)를 엄금(嚴禁)하시오→손대지 마시오
(서구어) 데이터→자료 레스토랑→식당 멤버→구성원 캠퍼스→교사, 교정 패션→유행
위의 예들은 그동안 국어 순화 정책에 의해 순화된 순화어들이다. 순화어가 순화 대상어를 몰아내고 정착되어 잘 사용되는 예가 있는가 하면 순화 대상어의 사용률이 더 높은, 순화어가 무색한 예도 적지 않다. 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어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순화어가 비교적 언중들에게 잘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서구어는 순화어와 순화 대상어가 의미 영역을 달리하여 여전히 두 어휘 모두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 들어오는 서구어는 이미 그 뜻에 해당하는 고유어 또는 한자어 어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치하는 예가 많다. ‘열쇠’에 대해서 ‘키’, ‘우아하다’에 대해서 ‘엘레강스하다’, ‘(예약) 확인’에 대해 ‘컨펌’ 같은 외국어가 사용되고 있다. 고유어와 한자어 어휘를 서구어(물론 주로 영어다)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광복 이후 국어 순화는 정부 주도이긴 하지만 민간이 함께 발맞추었고 국어 순화가 곧 애국으로 간주되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화 시대라고 하는 21세기, 정부 주도의 순화 정책은 물밀 듯 들어오는 서구어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국민들의 서구어에 대한 반감은 그리 높지 않은 실정이다. 2005년 국립국어원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외국어 사용의 증가에 대해 58.1%가 ‘개방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어느 정도 증가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답하였고, ‘아무리 증가해도 상관없다’는 응답도 11.0%나 되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외국어를 줄여 나가야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8.2%에 불과하였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말로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39.9%, ‘외국어 사용이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라는 응답이 28.9%를 차지하여 외국어 사용이 우리의 언어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에 ‘인프라, 컨소시엄, 로드맵, 엠바고, 태스크 포스, 니즈, 인력풀, 딥 스로트, 마타도어, 클러스터, 테스트 베드’와 같은 외국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어의 모습이다. 로마자의 사용은 도를 지나쳐 중국 교포들은 으레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 여긴다. 일본어 잔재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 서구어에 너그러운 우리의 모습, 한글날을 맞아 스스로가 어린 백성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