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8월 14일 종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매진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언동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담화는 훨씬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여론을 의식했는지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라는 무라야마 담화의 핵심 키워드는 모두 사용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주어와 대상은 생략한 채 모호하게 표현됐고, ‘반성’과 ‘사죄’는 주어 없이 과거형으로 써 가해 책임의 현재성을 교묘히 피해갔다.

이 담화는 단 한 명의 지도자 아베 개인의 그릇된 인식의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본을 지배해 온 보수 우익 전체의 거꾸로 선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은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줬다’는 대목이다.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던 사실을 은폐하고, 그 이전에 오키나와, 타이완을 침략한 사실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타이완의 식민지 지배도 언급하지 않고 ‘식민지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 자결의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유체이탈적 표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책임을 호도하는 것이다. 아시아 침략 사상의 발상지인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를 세계유산으로 둔갑시킨 일본 정부가 아예 주변국을 침략해 식민지화하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던 역사를 작정하고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단 한 번 언급한 ‘침략’이라는 표현도 지극히 일반적인 문장 속에 슬쩍 끼워 놓았다. 세계공황 이후 서구 국가가 추진한 경제 블록화가 분쟁의 씨앗을 키웠다고 핑계를 대면서 일본의 전쟁 도발은 국제적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리화했다.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르쳐 전쟁의 길을 걸어갔다’는 식의 추상적 말투는 누구와의 전쟁이었는지 그 대상조차 소멸시켰고, ‘침략’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전쟁을 단순히 ‘힘의 행사’로 묘사하는 데 그쳤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담화에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담겼을 리 만무하다. 역대 내각의 입장이 흔들림 없을 것이라는 간접화법에다가, ‘거듭 반성과 사죄를 표명해 왔다’며 과거형으로 말함으로써 책임의 주체인 아베 스스로가 사과의 주체에서도 빠져나가는 신공을 보였다. 더구나 일본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최대 피해국인 한국에 대한 명시적 사죄는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도 자국의 전쟁피해를 상세히 열거해 가해와 피해 책임을 모호하게 흩뜨렸다. 특히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에 대해 각별한 사과와 감사를 표현한 것은 최근 미쓰비시가 세계유산 등재 후 강제노동 피해자 문제를 다룬 것과 같은 전형적인 이중적 태도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는 ‘합법’이었고, 강제동원, 강제노동은 없다고 합리화하는 역사수정주의적 인식이 담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게다가 더 위험스러운 사실은 일본이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걸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기본적 가치를 기반으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겠다고 포장하고 있지만, 이는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겠다는 표현에 불과하다. 현재 안보법안 강행처리, 평화헌법 개정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동북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하게 미국만 긍정적으로 논평한 것을 보면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것임을 방증한다. 

아베는 과거의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후 세대에게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전후 세대, 특히 20대들이 국회 앞에서 전쟁반대, 평화헌법 수호를 외치며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아베에게 퇴진을 요구하며 연일 항의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아베는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주변국들을 외면하고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로의 진전을 어그러뜨리면서, 자국의 국민으로부터도 저항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반성과 사죄는 어디까지나 과거사 문제 해결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사죄의 담화를 되풀이해도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부터 아베가 담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든 진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번 담화를 통해 신뢰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shse1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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