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당선작

 
과일이 있는 주말
 
이은지(문예창작14) 
 
웃음
입 모양만 보고
웃음
연결 곡선
웃음
사이에는 사과 껍질
붉은 고리가 있을 것
신선한 채로 칼끝에 매달려 있을 때와
내 손으로 가장자리를 잡았을 때
 
따뜻한 바람이 불어
눈과 눈
손가락과 손가락
 
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어
창문은 닫혀 있고
칼날엔 빨갛고 기다란
줄기
 
그리하여 수렴된
접시 위에 사과
달디 단 풍경
 
 
 
시 당선 소감
 
언제부턴지 자신감이 꼬리를 빼고 달아났다. 그 후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눈만 뜨고 이불 밖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무기력해지다가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어지고 무책임하게 시간을 보내다 자기비판 그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이 증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에 자책한다. 미룰 수 없이 ‘해야 한다’ 하는 일이 있을 때 잠깐 걱정을 잊는다. 한동안 이 반복이었다. 의기소침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알았음에도 듣고 나서야 왜 그럴까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다독임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기분이 나아졌다. 문득 모두 다 불안한 시즌이라면 이것을 효과적으로 즐기는 법은 없을까 생각했다. 몇 가지 방법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한다’는 수레 위였다.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을 미뤄두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내리막길은 더 가팔라지는데 나는 수레 손잡이를 잡고 있는 형국이다. 대체 왜 이럴까 결론이 나기 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시험 기간이었다.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어났다. 소식을 받은 것은 한글날 이불 속에서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새롭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하고 긴장하면서 웃었다. 응축되었다 풀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지나치기 아까웠다. 그래서 파일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수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소식과 감사한 말이 이런 생각을 확신하는 데에 많은 힘을 준 것 같다. 북돋워 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시 심사평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첫째,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 슬픔이나 고통을 곧바로 토로하기보다는 슬프거나 괴로울 때 보이는 그 주변을 그려야 한다. 그때, 시는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둘째, 그럴 듯한 표현을 위해 언어를 낭비하지 말자. 기성 시의 발성법을 흉내내며 과도한 이미지를 쫓지 말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때, 시는 미지의 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심사자는 못 그린 그림인데도 자꾸 눈이 가는 그림 하나를 만나기를 바랐지만, 시에 대한 넘치는 애정이 오히려 시를 허약하게 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시는 작고 소박하게 씌어졌을 때 오히려 크고 위대해질 수 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완성하겠다는 목표보다 자신의 몸속에 어른거리는 것에, 우리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것에, 살아 있는 숨길을 열어주겠다는 간절함이 필요하다. 이은지의 <과일이 있는 주말>은 사과를 깎는 단순한 일이 어떻게 절대적인 순간이 될 수 있는지를 몇 개의 단어와 단문으로 담백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깎고 있는 사과의 모양이 웃는 입꼬리를 닮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사과 껍질이 길게 이어지면서 사과가 위치한 시공간이 새롭게 발견된다. 심사자는 이 새삼스러운 사실에서 우리 일상의 판타지를 보았다. 자신의 경험이 더 깊게 연루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쉽게 사라져버리는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성을 부여하고, 익숙하고 흔한 일상을 환기시켜 절대적인 사건으로 바꿔놓는 것이 또한 시의 위의일 것이다. 그래서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라면, 우리 마음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은 우려일 수 있겠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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