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실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다뤘다. 덕혜는 8살 때 아버지 고종을 잃고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가게 된다. 그 후, 오랜 세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영화는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옹주의 일대기를 표현하며 호평을 얻었지만, 실제 그녀의 삶보다는 픽션으로 줄거리가 채워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삶 자체가 가치다

영화 <덕혜옹주>는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루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화제를 모았다. 역사 속 고종이 즉위했던 당시의 왕실은 일제에 대항하지 못해 무능력하게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고국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았던 옹주의 삶을 부각시킨다.

사실 그녀의 삶에 영화는 일정 부분 픽션을 더했다. 전개 중 독립 연설, 상해로의 망명과 그 이후의 일은 사실과 다르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현실에서는 소극적이었던 덕혜를 작위적으로 그려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실제로도 공개적으로 일본의 한일병합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고 조선 왕족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또한, 그녀의 삶을 그린 소설「덕혜옹주」에서도 일본 학교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멸시하던 학생들에게 굴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그들이 덕혜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고 묘사돼 있다.

또한, 영화는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조국에게도 버림받았던 비운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 직접적으로 담아냈다. 재미를 위한 각색이 있었지만,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그녀의 삶을 왜곡하지 않고 옹주가 그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제 덕혜의 “나는 낙선재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라는 말에도 드러나듯,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어떤 행동도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덕혜옹주는 당시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상징한다. 고국과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고 18살이라는 나이에 그녀가 얻은 조현병과 실어증이라는 병은 그 슬픔의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옹주는 조선인에게 ‘희망’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영화 속 그녀는 끊임없이 역경을 극복해낸다. 그 의지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는 ‘가치’ 그 자체다.


강연희 기자 yhadella@naver.com


스크린 위의 양치기 소년
이 영화는 주인공인 덕혜의 캐릭터 설정부터 허구적인 면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일본 학교에 다니며 매일 같이 기모노를 입었던 덕혜를 일본 옷 입기를 끝까지 거부한 인물로 그렸다. 또, 덕혜가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려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에 관한 공식적인 사료는 없다.

덕혜뿐 아니라 그녀의 이복 오빠인 영친왕 캐릭터도 상당히 조작됐다.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의친왕과 영친왕의 실제 생애를 뒤섞어 제3의 영친왕을 만든 것이다. 의친왕은 독립운동을 위해 스스로 상해 망명을 기도했지만, 영친왕은 임시 정부가 억지로 독립운동에 가담시키기 위해 납치한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는 의친왕 망명 사건과 영친왕의 납치 사건을 합쳐 ‘영친왕의 망명 사건’으로 그렸다. 즉, 영친왕이라는 인물에 의친왕의 항일 정신과 망명 기도를 덧입힌 것이다. 두 사건은 독립운동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자발성’과 ‘강제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화 속 역사 왜곡은 이외에도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분명 덕혜옹주를 비롯한 조선 왕실의 내력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역사를 미화해, 사람들에게 억지로 애국심을 독촉하는 행태는 지양돼야 한다. 차라리 원작 소설「덕혜옹주」처럼 강제로 치러진 그녀의 결혼 생활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덕혜옹주는 단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설정된 주체로만 사용되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 <덕혜옹주> 초반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역사 왜곡이 용인될 수는 없다. 창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역사 재해석의 수위를 넘나드는 영화의 외줄 타기가 아슬아슬하다.

김진경 수습기자 wlsrud6843@naver.com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