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 등 5개의 궁이 있다. 이 중에는 심하게 훼손돼 본래 모양을 잃어버린 것도 있고, 또 흔적만 아스라한 것도 있다. 그나마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창덕궁 정도이니, 이는 우리 근대사의 아픔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외국의 궁전과 비교하며 우리 궁궐의 작음과 초라함을 탓하곤 한다. 이제 계절은 점차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고궁의 나무들도 형형색색 고운 색으로 물들어 간다. 궁은 조선의 왕이 머물던 최고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궁에 심어진 나무들 역시 가장 진귀하고 아름다운 나무여야 격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궁의 나무들은 참나무, 떡갈나무 같은 보통의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궁 조성에 있어 진귀한 나무를 심어 꾸미거나 희귀한 동물을 사육하는 것을 금했다. 왕은 온 백성을 두루 보살펴야 하는 중차대한 책무를 지닌 자리이기 때문에 한가로이 진귀한 화초를 탐하고 귀여운 동물을 희롱하며 여가를 보낼 틈이 없기 때문이다. 왕은 그 관심을 오로지 백성에게 둬야 했다. 꽃피는 봄이 되면 꽃놀이를 가고 싶고, 단풍이 어우러지면 소풍이라도 떠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왕이 사냥이라도 떠날라치면 충직한 신하들은 궁의 뜰에 심어진 나무들을 가리키며 엎드려 아뢰었다. “전하! 뜰 밖의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들이 연록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지금은 백성들이 한창 모내기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입니다. 이런 때 행차를 하시면 백성들은 때를 놓쳐 농사를 그르치게 되니, 삼가십시오.” 왕은 궁 뜰 앞의 단풍을 보며 계절을 가늠하고, 이를 통해 한창 추수에 바쁜 백성들의 삶을 헤아려 행차나 행사를 자제했다. 궁에 심어진 나무는 바로 계절의 변화를 시각정보를 통해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그 본분과 책무를 상기시키는 경보장치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궁에는 상록수 대신 활엽수를, 또 귀한 나무가 아닌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나무들을 심었던 것이다. 올해도 고궁에는 어김없이 단풍이 물들고 있다. 눈의 호강에 앞서 그 심중한 의미를 짚어내어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고궁이 그저 작고 초라한 볼품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가없는 배려는 시대를 불문하고 존중되어야 할 숭고한 가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이 날로 심화되고, 갑과 을로 대변되는 두 입장의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는 세태에 한갓 나무를 통해 응당 지켜야 할 도리를 새기고 삼가야 할 것을 경계하는 염치의 덕목을 상기시키는 선인들의 지혜를 살펴볼 일이다. 단풍이 해맑고 따사롭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저 공해에 찌든 환경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단풍마저 아프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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