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토머스 조이너 / 황소자리-

우리는 흔히 자살로 죽음을 택한 사람은 생전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힘들다’가 어느 정도의 괴로움을 뜻하며 어떤 상황에서 파생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자살시도를 하지 않은 사람 중에도 고통을 겪거나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자살한 사람에게만 더 버티기 힘든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죽음을 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의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 3가지를 설명한다. 많은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 ‘자살 충동’을 경험하겠지만, 행동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첫 번째 조건은 ‘좌절된 효능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살은 단순히 좌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유발되지 않는다. ‘좌절된 효능감’이란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짐’이라고 느끼는 것으로, 자살의 실질적인 원인이 된다. 이 감정이 극대화된 사람일수록, 자신의 무능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리고 결국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과 수치감을 계속 안고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가 자살시도를 한 환자들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그들이 자살 기도를 하기 한 달 전에 가장 많이 드러낸 감정은 ‘남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이었다. 또한, 이 환자들은 다른 비정신질환자 집단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서도, 타인은 훨씬 더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즉,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현저한 격차가 있다고 보며 스스로 한심한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있었던 것이다.


자살에 이르게 되는 두 번째 조건은 ‘좌절된 유대감’이다.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러므로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 즉 유대감의 부재는 우리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준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죽음 직전에 ‘고립’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살과 관련된 모든 문헌을 통틀어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게다가 유대감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을 때에는 신체적 고통을 느낄 때와 흡사하게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도 있다. 즉, 우리의 뇌는 사회적 배제나 배척을 신체적인 아픔으로 여길 만큼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속 욕구란 인간에게 있어 무척이나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충족되더라도 자살을 막을 수 있다. 우울증을 겪는 환자가 “죽고 싶지만, 차마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로 인한 예시로 볼 수 있다. 여러 자녀를 둔 여성이 자녀가 전혀 없거나 적은 여성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낮은 것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자살을 택한 이들은 ‘치명적인 자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을 공통적으로 습득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좌절된 효능감과 유대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만큼의 ‘반복된’ 자해 경험이 있어야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이는 자해와 관련된 두려움과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에 자해나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자살경향성은 자연히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치명적인 자해 능력은 반복적인 부상과 고통에 노출되면서 얻기도 한다.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통에 대한 추상적인 공포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령, 정기적으로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피어싱을 하는 사람은 고통에 익숙해질 기회가 많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자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총기가 집에 있는 경우,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자극에 익숙해지고 무뎌질 수 있다. 자살을 막아주던 내면의 방어벽이 고통, 위험 등에 무덤덤해지면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 번이라도 자살을 고려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3가지 조건을 기억하고 항상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저자는 치명적인 자해를 가하는 능력은 쉽사리 얻어지지 않고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은 재빨리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유의하라고 당부한다. ‘느낌’은 그 자체로 절대 사실이 될 수 없다. 허황된 감정에 못 이겨 죽음을 택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지은 기자 unmethin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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