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부문 당선작

상 중 하 

윤혜정(문예창작 13)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녹색 문이 열렸다. 대문의 높이가 낮아 지선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어 나와야 했다. 지선의 왼쪽 어깨엔 가방이 걸려 있었고 오른손엔 펜과 파일이 들려 있었다. 뒤따라 나온 노인은 허리가 90도로 굽어 지선의 얼굴을 쳐다보려 고개를 위로 꺾었다. 뒷짐을 진 그녀는 손에 요구르트 하나를 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이번에도 잘 부탁해, 노인네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그리고 이거 하나 먹으면서 가.”
노인이 뒷짐을 풀고 지선의 손을 잡으며 요구르트를 쥐여줬다.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 치는 지선에게 노인은 지선의 가방에 요구르트를 넣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 이건 잘 먹을게요. 나오지 마세요.”
“그래, 나 이제 무릎이 삭아서 많이 못 나가.”
두 사람은 대문 앞에서 번갈아가며 세 번, 네 번을 인사했고 끝내 지선이 먼저 돌아서자 인사는 끝이 났다. 지선은 뒤를 돌아 다시 그 집을 봤다. 노인이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에 옥상과 반지하가 있는 집이었다. 노인의 방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 형광등도 한쪽밖에 없는 것이 그것마저 깜박이고 있는 원룸이었다. 대낮임에도 어둡고 습한 방에는 이미 구석구석 곰팡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 않으세요? 지선이 물으면 어차피 눈도 깜깜해서 그거나 그거야. 하고 노인이 말했다. 허리가 그래서 전등은 어떻게 갈아요, 하고 지선이 또 물으면 집주인한테 부탁하거나 사람이 올 때 부탁한다고 노인이 말했다. 등은 지선과 동행했던 상진이 갈았다.
 
지선은 고개를 들어 옥상을 봤다.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옥상에 늘어진 흰색 민소매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라이터 불도 희미해졌다. 남자가 불을 살리며 손으로 입 주위를 감쌌다. 담배를 문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 남자가 아래 서 있는 지선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지선이 뒤로 돌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골목의 집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에 걸린 가방을 끌어 올리고 지선은 빠르게 걸었다. 이 주택 밀집촌 옆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지선의 집이었다. 그녀의 방 창문에서는 이런 주택단지가 보이지 않았다. 지선의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곧 멈췄다. 배달원이 내리더니 철가방을 들고 녹색 문을 열어 들어갔다. 작은 계단 몇 개를 단번에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옥상에서 이어진 철계단에서 내려온 남자가 돈을 건네주고 음식을 받았다. 지선은 골목을 마저 빠져나갔다.
편의점에 들러 생수 한 통을 사고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뜨거운 여름 볕을 피해 들어온 편의점의 에어컨은 이미 추울 정도였지만 지선은 내내 들고 있던 플라스틱 파일을 위아래로 흔들어 땀을 식혔다. 지난날 예고 없이 내린 비로 인해 노인의 방은 습하고 물 냄새가 났다. 지선이 이번 방문에서 전달한 물품은 여름용 이불과 쌀 한 포대, 파스나 반창고 등 기본 의료도구들이었다. 종합복지관에서 지선과 함께 출발했던 상진은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며 얼마 머물지 않고 갔다. 남은 평가는 지선의 몫이었다.
지난 겨울방학에 지선은 종합복지관에서 실습 일을 했다. 그때에도 같은 노인의 집을 방문했었다. 전과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선은 물을 한 입 마시고 파일을 펼쳤다. 이귀복, 이라는 노인의 이름과 주소와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지선이 할 일은 마련된 서류와 실제 거주하는 집을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계속해서 복지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상, 중, 하’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지선은 볼펜을 바닥에 톡톡 두드리다가 ‘상’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제 노인은 지선이 학교에 다닐 한 학기 동안 다시 지원을 받을 것이다. 지선은 노인의 종이를 맨 뒤로 넘겼다. 다음으로 가야 할 집은 바로 옆 동네의 다가구 연립주택이었다. 휴대폰에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찾아 켠 후 가야 할 집의 주소를 검색했다. 도보로 15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지선은 파일을 가방에 넣으려 열었다. 노인이 준 요구르트가 필통과 파우치 사이에 껴 있었다. 지선은 그걸 꺼내 유통기한을 살핀 후 마셨다.
시멘트 마당에 적갈색 화분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안에서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건물은 길쭉한 직사각형의 건물로 가, 나, 다 세 동이 있었다. 복도식 연립주택인지 주차장 겸 공동마당으로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니 외벽에 달린 유리창들은 갈색에 하나같이 크고 바람이 불면 깨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태풍에 방지하기 위함인지 군데군데 크게 박스테이프로 엑스자를 만들어 놨다. 건물에 흰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흘러내린 자국이 바닥에 물웅덩이처럼 나 있었다. 지선은 파일을 다시 펼쳤다. 그녀가 가야 할 집은 ‘나’동의 102호였다.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샀던 물을 다시 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연립주택엔 현관문도 없었다. 그저 들어가면 왼쪽으로 몇 개의 문이 있고 오른쪽으로 또 몇 개의 문이 있었다. 지선은 왼쪽으로 들어갔다. 복도 타일은 정사각형으로 금색 띠가 둘러져 있는 회색 타일이었다. 지선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복도 타일과 비슷했다. 102호 문 앞에 선 지선은 시간을 확인하고 파일을 열어 가족구성원을 확인했다. 2년 전 교통사고로 시각장애 판정을 받은 남자에게 지선과 동갑인 딸과 노모가 있었다. 생계는 폐지를 줍는 노모와 화장품가게에서 일을 하는 딸이 책임지는 듯했다. 지선은 가족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모의 이름부터 읊조렸다. 황순자, 진수용이 아버지, 진솔이 딸이었다. 진솔. 지선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선은 파일을 덮고 눈을 감았다. 파일을 가슴께로 가져와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5초를 참고 길게 내뱉었다. 한 번 더 반복했다. 지선은 뒤로 돌아 나가려 하다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이 있었으나 지선은 발견하지 못했다. 노크를 두 번 하고 아무도 없으면 돌아가려 했다. 종합복지관에는 다른 날 직원이 다시 방문할 것이다. 단지 봉사활동 개념으로 복지관 직원들을 돕는 거니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지선은 생각했다. 노크를 다시 할까 지선이 망설이자 누구세요, 문고리를 잡고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듯 가까이서 목소리가 들렸다. 상진은 지선에게 늦을 테니 먼저 들어가 상태를 보라는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나왔어요. 곧 문이 열리고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현관의 슬리퍼를 밟고 선 노인의 발이 보였다.
“황순자 할머니?”
“복지관에서 왔다고?”
순자의 말에 지선은 하루 내내 걸고 다니던 표찰을 보여줬다. ‘사례관리자 이지선’이라고 적힌 임시 신분증을 보던 노인이 문을 활짝 열었다.
“드디어 오셨네. 드디어 왔어.”
현관에는 지하철역에서 한 장에 삼천 원 하는 옷을 모아둔 가판대마냥 신발이 어질러져 있었다. 여자 운동화, 여자 구두가 몇 켤레, 슬리퍼 몇 짝이 보였다. 지선은 조심히 빈 곳을 찾아 단화를 벗었다. 방은 현관 옆에 하나, 거실 옆에 하나가 더 있었다. 거실 옆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누워 있는 한 남자의 희끗한 머리가 보였다. 지선의 시선을 확인한 순자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옅게 홍어를 삭힌 것처럼 냄새가 났다.
“2년 전에 빌어먹을 뺑소니에 당해서 움직이도 몬하고, 말도 잘 안 허고, 계속 저러고 누워있기만 하고.”
순자는 말을 이어나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입을 한두 번 막으며 말했다.
지선의 손을 잡아오는 순자에게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방에 해가 들어 냄새는 더 강하게 났다. 창문을 모두 열어놨지만, 그 방에만 냄새가 머물러 있는 듯했다. 남자의 머리가 덥수룩하고 기름진 것이 며칠은 씻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선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분이 그럼 진수용 아버님이신 거죠? 지선의 물음에 순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자의 미간 사이에 길게 주름이 지어졌다. 눈꺼풀엔 살이 없어 주름이 잘게 졌다. 눈 앞머리에 물기 어린 눈곱이 노랗게 보였다. 순자는 지선의 손을 놓지 않고 위아래로 흔들며 잘 부탁한다, 잘 부탁한다, 말했다.
상진은 예정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지선은 상진의 보조 자격으로 와 있었기 때문에 집 구조를 살펴보고 가족들과 면담하는 건 상진이 해야 했다. 순자와 상진이 앞장서고 지선이 그 뒤를 따랐다. 집안의 가구살림은 잡다한 것이 가득해 작은 집이 더 작아 보였다. 순자는 하나하나 설명을 해줬다. 친척 누구에게 받아온 식품 건조기, 지금은 이혼하고 없는 며느리가 시집올 때 장만해온 옷장, 옷장은 수용이 누워있는 안방에 있었는데 낮은 천장과 좁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골동품 느낌이 났다. 원목 나무로 만들어 튼튼하다는 식탁도 전에 살던 집에서 버리지 못하고 가져왔다고 했다. 그 때문에 부엌에서 거실로 지나가려면 의자를 식탁에 완전히 집어넣어야 했다. 주방의 가스레인지 옆에는 기름 찌든 때가 껴 있고, 초록색 타일 무늬 벽지는 위에서부터 뜯어지고 있었다. 상진은 가구마다 버리지 못할 사연이 있다는 순자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선은 뒤돌아 하품을 하다 수용의 방문이 닫혀있다는 걸 알았다. 순자와 상진은 부엌 뒤에 작게 딸린 다용도실에 들어갔다. 세 사람은 들어갈 수 없게 물건이 가득 차 있어 지선은 밖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보일러는 낡아서 찬물 뜨거운 물이 맛이 갔는데 기사를 부를 돈이 없다, 세탁기도 열 번 돌리면 한 번은 탈수가 안 되는데 기사를 부를 돈이 없다, 다용도실에 쌓인 업소용 식기들은 친척 누구에게서 받은 건데 다 언젠가 다시 큰 집으로 가게 되면 사용할 것이니 버릴 수 없다, 며 말을 쏟아냈다.
지선은 세 걸음쯤 걸어서 거실로 갔다. 벽에 달려있는 거라곤 시침 소리가 큰 시계 하나밖에 없었다. 가족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하고 나오던 상진은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괜찮아요? 놀란 지선의 물음에 상진은 멋쩍게 웃었다. 덩치가 큰 상진이 이 집에 들어오니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는 사람이 다 어색했다. 식탁에 앉은 상진은 순자에게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했다. 그에 순자가 어린아이처럼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리고 상진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상진은 필요한 것들에 대해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근데 아버님은 깨어계셨나 봐요?”
지선의 물음에 순자가 방문을 확인했다.
“아이고, 미안해요. 우리 애가 원래는 사업도 하고 사람들이랑 지내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데, 사고를 당하고부터는 저렇게 말도 안 하고 혼자만 있으려고 저래요.”
상진은 지선에게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보라며 의자를 빼줬다.
“사례관리 신청은 누가 했죠?”
상진이 물었다.
“우리 손녀가요. 지금 일하러 갔어요.”
진솔을 말하는 거였다.
“잠깐 뵐 수 없나요? 집도 보고 가족 분들도 한 번 봬야 하는데.”
“올 수 있음 오라고 할게요. 요 앞에 화장품 가게서 일하니까.”
골목을 두 번 꺾어 나가면 있는 사거리의 화장품 가게였다. 순자는 휴대폰을 들어 고개를 뒤로 빼고 화면에서 번호를 누르더니 이내 전화를 걸었다. 지선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곧 손톱 옆의 하얗게 일어난 각질을 뜯어내 바닥에 튕겼다.
통화를 끝낸 순자는 돋보기안경을 찾으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 상진이 몸을 당겨 의자를 최대한 넣었으나 원형의 식탁 뒤에 자리한 냉장고와 의자 사이는 뱃살이 튀어나온 순자에게 버거워 발끝을 들고 지나가야 했다. 거실에 안경이 없다며 순자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은 말 못 하시니?”
“모르겠어요. 저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안방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였다. 한 번 큰 소리가 난 후에는 뜨문뜨문 대화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상진은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 지선은 닫힌 방문과 상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싸우는 걸까요?”
“가끔 저런 사람들도 있어.”
지선의 물음에 상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문을 닫고 순자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 다가왔다. 상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끝까지 밀어 넣어 순자가 지나갈 수 있게 비켰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 턱에 주름이 졌다. 상진은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 순자가 박수를 한 번 치더니 컵에 물을 따라 왔다.
순자가 더 이상 집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질 때에야 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진은 시계를 보고 잠시만 기다리다 다시 오겠노라 했다. 상진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솔은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하나로 묶은 뒤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실삔으로 올려 정리했다. 입은 빨간색으로 칠했고 연녹색 블라우스에 회색 면바지를 입었다. 그러고는 단화를 벗고 바로 식탁에 앉은 상진과 지선에게 왔다. 지선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솔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솔과의 인터뷰는 상진의 몫이었다. 지선은 두 손을 식탁보 밑으로 내리고 맞잡았다. 왼손 엄지손가락에 분홍색으로 칠한 네일이 조금 벗겨져 있었다.
상진이 솔에게 질문을 했다. 한 달 월급이 얼마인지, 실제 생계를 솔이 번 돈으로 해결하는지, 솔은 상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대답을 했다. 대답 중간중간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화장품 가게에서는 5개월 째 일하고 있다 했다.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내년쯤엔 매장 매니저에 지원해볼까 고민 중이라 했다.
“근데 혹시 이지선 아니야?”
지선이 고개를 들었다.
상진도, 순자도 지선을 바라봤다. 지선은 솔을 봤다. 지선의 눈을 보더니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내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맞네, 남현고등학교 맞지? 몰라봤네, 너무 예뻐져서. 솔이 웃으며 손을 잡았고 지선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벌써 취업한 거야? 사회복지사? 솔의 목소리는 크고 높았다. 아니, 봉사활동 같은 거야. 직원은 아니고. 지선이 말하자 솔은 눈을 크게 뜨며 아, 그래? 반갑네. 하고 다시 상진에게로 시선을 돌려 질문에 대답했다. 지선은 명치 부분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것이 목으로 올라와 그녀의 턱 아래까지 시큰하게 했다.

횡설수설하던 순자와 달리 솔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걸 상진에게 정확히 전달했다. 상진과 지선, 솔은 함께 연립주택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해가 떠 있었다. 한여름의 해는 현실감 없이 길게 떠 있었다.
“둘이 친구야?”
“친구죠,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어요.”
상진이 묻고 솔이 답했다. 지선은 파일을 들고 있어 어깨동무를 해오는 솔을 피할 수 없었다. 바래다주고 싶은데, 난 복지관에 일이 있어서. 시간 늦었으니까 파일은 정리해서 내일 가져오면 돼. 상진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지선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다 만나네. 어떻게 사는지 가끔 궁금했는데.”
솔이 일하는 화장품 가게는 지선의 집 방향과 같았다.
“옛날 일 다 잊어, 난 너 이름도 가물가물했는데 얼굴 보니까 생각나더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솔이 말했다.
지선은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보며 걸었다. 이런 식으로 솔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지선은 지난날의 다짐들을 떠올렸다. 어른이 되어 솔을 만나면 얼굴에 침을 뱉으리라, 똑같이 복수해주리라, 똑같이 아무런 이유 없이 비웃고 욕을 하리라, 하지만 솔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그 같은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전히 말도 없고 답답하네. 나 먼저 간다. 우리 집 꼴 봤지? 잘해.”
골목을 빠져나와 두 갈래 길에서 솔은 왼쪽으로 빠졌다. 시장을 중심으로 사거리 도로가 있는 곳이었다. 도로 앞으로 로드샵들이 줄지어 있는 동네의 번화가 중 한 가게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지선도 몇 번 지나가 본 길이었다. 지선을 내내 불편하게 만들던 턱 아래 시큰한 것이 눈까지 번졌다. 지선은 숨을 빠르게 쉬다 그대로 파일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을 발로 세게 내리쳤다. 지선의 발목이 저릿했고 동네의 개 몇 마리가 짖었다. 솔의 가족은 지선과 상진의 평가를 받아 정부의 지원을 받을지 결정된다. ‘상’에 표시를 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에 표시를 하면 ‘상’, ‘중’의 사람들이 지원을 받고 난 후에야 가능성이 생긴다. 상진은 먼저 갔고, 서류는 지선에게 있었다. 지선은 바닥에 떨어진 파일을 들어 먼지를 털었다.

지선은 왼쪽 길로 갔다. 사거리 도로는 이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좁았다. 보행자 신호를 넘어 차가 사거리를 빠져나가려면 같은 신호 두 번은 기다려야 했다. 무단횡단도 잦고 술집이 많아 밤이면 경적 소리, 고성방가가 자주 나는 곳이었다. 지선은 사람들 틈에 끼어 걸었다. 솔이 일하는 가게는 세일 중이었는지 하교한 학생들이 꽤 있었다. 솔이 유니폼을 입고 응대하고 있었다. 고객의 계산을 도울 땐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지선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1학년 3월, 이름 순서대로 짝꿍이 된 지선에게 솔은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떠들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새로운 짝을 만났을 때 이미 지선은 그 반의 왕따가 돼 있었다. 솔이 다른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나오다 밖에 서 있는 지선을 발견했다. 지선은 손에 든 파일의 모서리를 만졌다. 딱딱하지만 손톱으로 누르면 자국이 나는 재질이었다. 솔은 지선을 보고 웃었다. 지선은 그대로 뒤를 돌아 택시를 잡아타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뭐 두고 간 거라도 있어?”
상진이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집, 지원을 꼭 해야 할까요?”
지선의 물음에 상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선을 데리고 소회의실에 데려가 앉혔다. 그리곤 종이컵에 녹차 티백을 넣어와 지선에게 건넸다. 진수용씨 가족에게 지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상진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머리카락도 빛을 받으면 같은 색으로 빛났다. 그와 처음 사례관리팀으로 외근했을 때 물었었다. 왜 사회복지 일을 하는지, 힘들어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사해 할 때 신이라도 된 것 같다고 상진은 답했었다. 그에게 일은 어쩌다 선택하게 된 일일 뿐이었다.
“싫으면 하지 마. 네가 봤을 때 그 집이 기준에 맞지 않았네, 할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지선은 고개를 꾸벅이고 복지관을 나왔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가니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지선은 복지관 주차장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끈적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었다. 지선은 솔의 집에 가기 전 들렀던 노인의 방을 떠올렸다. 면역력이 약한 노인 혼자 지내기엔 곰팡이도 많고 볕도 잘 들지 않았다. 솔의 집은 방이 두 개에, 지하도 아니고, 수용에게서 나오는 보험금과 지원금이 따로 있을 것이다. 다만 수용이 현실을 부정하고 재활치료를 받고 있지 않아 잠시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것일 뿐이다, 라고 지선은 생각했다.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지선은 집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의 방에는 향초가 여러 개 있었다. 작은 것대로 큰 것대로 따로 정리해두었다. 진열대의 두 칸을 모두 차지한 향초 중 하나에 불을 붙였다. 지선은 파일을 올려두고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거실에 켜둔 에어컨에서 나온 바람이 그녀의 방까지 들어왔다. 향초에서는 라벤더 향이 났다. 불면증을 개선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지선이 피로감을 느낄 때마다 찾는 향초였다. 솔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선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손가락을 봤다. 물기가 없어지고 건조해지자 손톱 옆에 하얗게 일어난 각질들을 확인했다. 지선은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찾아내 제거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핸드크림으로 손톱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파일을 펼쳤다. 솔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시간은 아홉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창밖의 하늘은 남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지선은 창밖을 바라봤다. 높이 솟은 교회의 십자가가 붉게 빛나고 그 뒤로 하천과 연결된 산책로의 가로등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선은 휴대폰을 들어 솔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통화 버튼을 바로 누르지 않아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 않고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서는 냄새도 나지 않고 반찬 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뭐 먹게? 그녀의 엄마가 소파에 앉은 채 물었다. 아니, 그냥. 하고 지선은 냉동실에서 초콜릿 몇 개를 집어 방으로 돌아왔다. 포장을 뜯어 하나를 먹었다.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니 전화번호가 그대로 떠 있었다. 지선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 메모장에 솔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솔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피부는 매끈했고 눈 화장에 컬러렌즈를 낀 모습은 지나가다 돌아볼 정도로 예뻤다. 학생 때에도 늘 웃고 다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비웃는 것이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예뻤고 교사들에겐 상냥했다. 지선은 초콜릿을 하나 더 먹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들지 않았다.

가져왔니? 상진의 물음에 지선은 파일을 건넸다. 상진은 그걸 열어 계획서를 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어. 지선은 돌아서 소회의실로 들어가 앉았다. 그녀가 할 일은 이제 없었다. 그녀가 판단한대로 서류를 제출했다 해도 결정하는 건 결국 복지관이었다. 지선은 ‘하’를 선택했다. 그 옆에 자신의 의견도 함께 적었다. ‘진수용의 재활 의지가 보이지 않음, 정부에서 지원되는 장애 보조금과 솔의 수입으로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 적었다. 언젠가 상진에게 왜 이 일을 하느냐 묻고 난 후, 지선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아서 좋아요. 지난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지선은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복지관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섰다. 장마철의 습한 대기는 며칠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하늘은 먹구름이 넓게 깔려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손에 크고 작은 우산 하나씩 들고 걸었다. 확 비나 쏟아져라, 지선은 생각했다.
도로가에 파라솔을 하나 꽂아놓고 애호박이나 자잘한 고구마, 토마토 한 두 바구니를 모아놓고 파는 노인이 있었다. 그 옆에 다른 채소를 모아 파는 노인이 한 명 더 있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들릴 것 같지 않은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선은 한 노인에게 다가가 애호박을 달라고 했다. 이천 원을 건네고 채소가 든 검은 봉지를 건네받았다. 지선을 쳐다보는 노인의 얼굴은 주름이 많았다. 갈색 피부에 살은 늘어져 양 볼에 혹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 지선은 건너갔다. 한 손에 든 봉지가 묵직했다. 복지관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시청에서 관리하는 공공 농구장이 있었다. 지선은 그 옆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농구를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습한 날씨에 땀을 흘려 옷이 축축해 보였다.

상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니, 안 보이네. 농구대예요, 바로 들어갈게요. 지선은 봉지를 들고 다시 신호 앞에 섰다. 그때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손에 쥐고 다시 걸었다. 지선은 가방을 복지관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결국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지선은 앞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도로를 뛰어 건넜다. 파라솔 아래 노인들을 다시 지나치게 됐다. 두 노인은 느릿느릿하게 바구니들을 파라솔 안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관절이 시려서 비 오는 날을 안다던데 저 노인들은 모르는 건가 싶게 행동이 굼떴다.
“비도 오는데 밖엔 왜 나갔어?”
상진이 지선의 비에 젖은 검은 비닐봉지를 보고 말했다.
“그러게요.”
어느 의자에 걸려있던 수건을 건네준 상진은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했다. 상진의 책상이었다. 파일을 꽂을 자리가 부족해 노트북 옆에도 꽤 높이 파일이 쌓여 있었다. 그는 가장 위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지선이 제출한 파일이었다. 잘 읽었어, 정식 직원은 아니니까 참고만 할 거야. 지선은 그 앞에 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솔 씨한테 연락 왔더라. 너 잠깐 나갔으니까 돌아오면 말한다 했어. 상진은 볼일이 끝났으니 쉬고 있으라 했다. 지선은 다시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기다랗고 하얀 테이블에 여섯 개의 의자가 달려 있었다. 지선은 회의실 문밖을 봤다. 눈에 띄게 바쁘진 않았지만, 전화벨 소리는 자주 들려왔다. 지선은 메모장으로 들어가 전날 저장해둔 솔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오래 걸렸다. 여보세요? 창고에서 전화를 하는 듯 솔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이지선이야. 지선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떨리지 않았다. 나 찾는 전화 했었다며. 솔은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지 물었다. 아니, 너네 집 안 될 거야. 너희보다 못 사는 사람들 많아, 그 사람들이 먼저 지원을 받아야 하고. 솔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난 기준에 맞춰서 채점한 거야.”
“내가 너 괴롭혀서 그런 건 아니고?”
솔의 말에 지선은 전화를 끊었다.
지선은 소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외근을 나가는 직원들이 우산을 챙겨 나갔다. 곧 점심시간이었다. 상진은 지선에게 다가와 음식을 시켜먹자 했다. 지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노인에게서 산 애호박봉지가 보이지 않았다. 뭐 찾아? 지선은 들고 온 봉지를 못 보았느냐 물었다. 상진은 제 책상에 두었다 말했다. 웬 애호박이야. 상진이 물었고 지선은 답을 얼버무렸다. 밖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들 이 정도 비가 오면 집에 가시죠? 상진은 그럴 것이라 했다. 비 맞고 감기 걸려서 약국 가는 거나, 야채 한두 개 못 파는 거나 비슷해.
두 사람은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상진은 농담도 하고 복지관에 떠도는 소문들을 얘기하기도 했다. 지선은 중간중간 점점 비바람이 거세지는 밖을 봤다. 그리고 솔의 집을 떠올렸다. 수용에게서 나는 냄새를 빼기 위해 열어둔 창문을 생각했다. 이 정도 비라면 창문을 넘어 비가 방까지 들어올 것이다. 수용은 비를 맞으면 일어날까, 지선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내 상진이 걸어오는 농담에 웃느라 기억은 금세 잊혀졌다. 소나기는 상진이 그릇을 치우러 갈 때까지 내렸다. 이후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구름은 빠르게 흘러갔다.

  • 소설 당선 소감
     

가을이 없어진다, 없어진다 하고 말만 했는데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지나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계절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바쁘게 지낸 것은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다니고 주말이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낙엽이 지는 걸 인지하자마자 무기력하고 이상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바람이 거세져 몸을 웅크리게 되는 날입니다. 또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제 이야기 속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 하나로 누군가의 삶의 먹고사는 문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에 비하면 전문성이나 문제의식도 부족하고 글솜씨도 부족하지만 제 소설 「상중하」를 뽑아줘 감사합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으며 제게 이야깃거리를 준 친구에게도 고맙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만 되면 노래 ‘잊혀진 계절’이 여기저기서 틀어집니다. 어느 기사에서는 그 노래와 현실을 연결시켜 지금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따뜻한 카페에 앉아 밖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밤, 새벽까지 밖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이 대단히 느껴집니다. 또 한편으론 생각만 하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계절이 바뀌고 달력의 숫자가 바뀌지만 올해의 계절들은 여러모로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소설 심사평
     

한 편의 이야기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절대적인 시간과 노동에 값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이번에 응모된 16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먼저 그 노고에 격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의 작품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문장이 안정돼 있다는 점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미처 터득하지 못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소설에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자와 공유할 만한 의미를 발산해야 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구조적인 면을 떠나 감상적인 자기 토로나 일상의 보고에 그치는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조지혜의 「남자들이 지나간 자리」, 나수경의 「모래 위의 도시」, 윤혜정의 「상 중 하」 이상 세 편을 놓고 숙고한 끝에, 선자는 윤혜정의 「상 중 하」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남자들이 지나간 자리」는 여전히 남성성이 지배적인 세계에서 상처받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데 이를 문제의식으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구조의 완결성 또한 떨어진다. 「모래 위의 도시」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장르 상으로 미래소설에 속하는 이 작품은 재난을 소재로 점점 파괴되어 가는 도시와 그 세계에서 최후처럼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의식과 상상력만을 놓고 볼 때는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어야겠으나, 교차서술 방식으로 진행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면서 그만 짜임새가 약화되고 말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상 중 하」는 우선 차분하고 디테일한 서술이 눈길을 끈다. 불필요한 과장이나 감정의 노출 없이 끝까지 이야기의 톤을 잘 유지하고 있다. 사회복지사 실습을 나온 주인공 지선의 일상과 내면의 미묘한 흔들림을 포착하는 솜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야기가 역동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으나,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윤리적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소품일지언정 의미 있는 여운을 남긴다. 당선을 축하하며 이후 정진하기를 바란다.
 

윤대녕(소설가·문예창작과) 교수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