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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의 그림으로 남북 경계의 선을 넘다
아티스트 선무
2016년 12월 05일 (월) 15:20:25 강연희 기자 yhadella@naver.com
   
 

 

 ‘통일’은 우리나라에서 무척 중요한 논제다. 이산가족을 포함해 많은 이가 분단의 아픔에 힘겨워하며 이념으로 갈라진 남과 북이 손잡길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6월에 실시했던 통일 찬반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전체 응답자 중 65.8%만이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답했다.

 예술가 ‘선무’는 누구보다 가장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이다. 수년 전 그는 가족들을 북에 남겨두고 떠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29일, 국내의 ‘탈북자 출신 1호’ 작가인 그를 만나 그간 접할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그림 그리는 작가 선무입니다. ‘선무’는 남북 분단의 ‘선’이 없어지길 바란다는 뜻의 가명이에요. 제가 본명과 얼굴을 밝히면 북에 남이 있는 가족이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걸 철저히 숨기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그리나요

 저는 그림을 통해 ‘제 삶’을 얘기해요. 북한에 있을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은 제 전부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배워왔고, 모든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제 작품 속에는 그들의 얼굴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고 북한의 체제를 비판하는 그림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이 외에도 작품을 통해 삶과 관련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또, 제 아이들을 모델로 삼기도 하죠. 이들이 만약 북한에서 자랐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하며 그림에 담습니다. 그들은 환한 얼굴로 북한 어린이가 입는 옷을 착용하고 노래를 하기도 하고, ‘우린 행복해요’라는 푯말을 들고 북의 체제를 상징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도 하죠. 남한 아이와 북한 어린이가 손을 잡고 눈바람을 헤쳐 가는 모습도 있어요. 저는 그림에 ‘빨간색, 파란색, 흰색’만 활용합니다. 남과 북,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색상이죠. 북한을 나타내기에 빨간색이 가장 적절하기도 하고요.

남한에서 전시를 하며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전시를 열었을 때였어요. 전시를 기획할 때부터 중국과 북한이 매우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으니 사전에 전시와 관련한 어떠한 홍보도 하지 않고 개장 직후에 알리기로 협의했어요. 이처럼 무리하게 일을 진행했던 것은 중국에서의 전시가 저에게는 큰 의미였기 때문이죠.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혹여 발각될까 노심초사하며 중국 각지에서 숨어 살았거든요. 작품을 통해서나마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기엔 너무 아까웠습니다. 또, 한국도 중국과 활발히 교류를 나누는 사이니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시가 열린 당일, 중국 정부가 나서 미술관 입구를 봉쇄하고 작품을 모두 뺏어갔습니다. 1,000개의 작품 중 되찾은 것은 단 2점뿐이었죠. 중국 공안들이 들이닥쳐 저를 추적했고 제 가족과 친구들, 전시 관계자까지 수세에 놓이는 팽팽한 상황이 이어졌어요.

 또, 대학 시절 부암동에서 열었던 첫 전시에서는 제가 북한인이라는 이유로 빈번하게 신고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작품이 실렸다는 둥, 북한과 관련된 것은 꼴 보기 싫다는 둥 그 이유도 다양했죠. 이후에도 전시를 할 때마다 저는 많은 편견과 차별에 맞서야 했어요.

어떤 나라에서 작품을 선보였나요

 유럽,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작품에 관심을 보였어요. 몇 년 전, 노르웨이에서 각 나라의 금지된 그림을 그리는 40-50개국의 아티스트가 모이는 회의에 참여했었는데요. 주로 선진국의 사람들이 저희의 분단 현실에 관한 많은 질문을 쏟아냈고 제 작품이 독특하다 보니 다들 흥미를 가지더라고요.

작가님이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올 생각은 없었어요. 북에서 대학을 다녔을 당시, 너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구할 방도가 없어 중국에 사는 친척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죠. 한, 두 달 정도만 중국에 머무르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북한의 선거일이 닥친 겁니다. 북한에서는 선거를 국민 모두가 참여하도록 하기 때문에 제가 집까지 도착하기 전에 중국으로 온 것을 들킬 위기에 처했죠. 또,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북한의 상황에 비해 중국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계속 머무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안에게 발각되면 북송당하기 때문에 내내 숨어 살아야 했죠.

 그래서 한국 국적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방법을 모르니 막막했어요. 영사관에 전화해 봐도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 못했죠. 그래서 3년간 머물렀던 중국을 떠나 무작정 라오스와 태국까지 건너갔어요. 뭣도 모르는 정글에서 위험한 상황도 많이 있었죠. 운이 좋게도 라오스에서 도움을 받아 한국 대사관에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오게 됐고,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졌죠.

북한에서부터 예술을 전공하셨다고요

 북에서는 어릴 때부터 소질을 보이는 아이만 예술을 전공할 수 있도록 해요. 미술을 하면 사회, 특히 군대에 가서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그림을 가르치려고 하는데요.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로부터 특정 아이만 발탁되는 방식이죠. 북한에서는 12월 31일이 되면 우수한 아이들이 모여 국가 원수 앞에서 그림을 선보입니다. 어릴 적 김일성이 그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저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국처럼 곳곳에 예술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에는 예술전문학교가 각 도마다 하나씩 밖에 없어요. 12살 즈음 지원해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면 바로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죠. 그런데 저는 워낙 산골에서 살아서 그런 학교가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서 예술 대학으로 갔었어요. 남한으로 오고 나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해 다시 공부를 했고요.

한국과 북한의 미술 공부는 어떻게 달랐나요

 남한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서양 신화 속 인물을 다루더라고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오로지 김정일을 비롯한 인물을 대상으로 해요. 북한 체제 사상과 관련된 교육과 연계해 진행하기도 하고요. 또, 한국 대학에서는 추상화를 많이 그려요. 처음에는 대체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선이 죽 그어진 그림을 어떤 생각을 갖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기에 동기들과 교수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죠.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또 놀랐던 것은, 학생들을 위해 헌신을 다하는 북의 교사와 달리, 남한에서 만난 교수는 자신의 지식을 온전히 전달하지 않더라고요. 학생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도 않고요.

 한국에 와서 생소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신기한 것이 많았죠. 우선, 북한에서는 대학도 학교에서 짜주는 시간표대로 운영되는데, 여기에선 ‘수강신청’이라는 것을 한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어요. 또, 북에서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이외에도, 신입생이 들어오면 치르는 새내기 환영 문화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선정적인 게임을 즐기고 독특한 분장을 하는 모습이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홍익대학교에 재학하며 좋은 친구를 많이 얻었지만, 힘든 부분도 많았어요. 특히 1학년 때는 주위 친구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답답했죠. 그때 만난 한 선배는 “한국에서는 줄을 잘 서는 것이 중요하니 인간관계에서 득과 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자본주의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며 숨이 턱 막히더군요. 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았던 순간은 한국 사람 모두가 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였어요. 북한에 있을 때는 한반도 대부분의 사람이 남북이 결합하길 기원하는 줄 알았거든요. 주변 친구 중 실향민을 가족으로 갖고 있는 사람 외에는, 다들 갖가지 이유로 통일을 반대하더군요.

영화 <나는 선무다>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에는 저를 노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영상 제작을 요청하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었어요. 그러다 미국의 한 단체 소속인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저와 생각이 참 잘 맞더라고요. 보통 북한을 다룰 때 정치적으로만 보기 마련인데, 그는 그보다는 탈북민을 돕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해 왔어요. 이 학생이 속한 단체는 곤경에 처한 탈북민을 돕기 위해 모금 행사를 벌이고 중국에서 헤매고 있는 북한사람을 구출해 내는 활동을 하고 있었죠. 또, 감독을 맡은 학생이 제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도 영상 제작이 가능하다기에 촬영해 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제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됐죠.

앞으로의 계획은요

 지금처럼 꾸준히, 매일 그림을 그릴 겁니다. 분단 70년의 아픔을 가진 남과 북의 모습은 어떤지, 그 속의 내 감정은 무엇인지에 집중할 거예요.

 

강연희 기자 yhadell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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