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라는 표현이 세간에 화제다. 최근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정치 지도자가 자신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국민에게 하소연하니, 현실 정 치 속에서 ‘순수한 마음’의 실현이라는 게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당연한 의심이 들면서도 한편 으로는 이 시대에 순수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속의 때와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아이들, 실용적인 기능술과의 다름에서 존재 이 유를 찾으려 했던 순수 예술 혹은 순수 학문,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펼쳐지는 양치기 소년 의 순수한 사랑, 순면, 순정부품, 순정만화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순수함의 범주는 무척 다 양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순수하다’는 전혀 다른 것이 섞임이 없거나 혹은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을 때를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순수하다’는 표현은 불순한 의도를 초월해 자연 발생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 같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떤 본질의 것과는 ‘다른’ 삶의 조건이나 대상과 필연적으로 관련돼 있다. 즉 순수함을 구성하는 과정은 단독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 내면 의 성장이 이뤄진 이후, 인간이 본질의 순수함을 인위적으로 애써 내세우려는 상황은 대체로 ‘다른’ 것과의 구별 짓기와 다름 아니다. 이러한 억지 행동은 ‘순수함’을 말로만 체화하려는 것 이고, 더 나아가 순수함만이 진실하다고 강변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요컨대 ‘순수하지 않음’ 을 회피하려는 일종의 자기 주문(呪文)과도 같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이러한 주문을 반복적으 로 익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순수함의 상태에 대한 무의식적 그리움을 순수함의 성 취(成就)로 쉽사리 착각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순수함의 확인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하는 행위가 정치 행위의 한 부분 일 때이다. 그 착각의 파급 효과는 자못 심각할 수 있다. 정치 지도자의 의식은 국민의 삶을 채 울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형태에 대한 구체적 반성 능력을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시대의 정치 지도자에게는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생활환경 의 요청에 끊임없이 답할 수 있는 심미적 정치성이 절실하다. 공인이 독백의 형식을 통해 자신 이 순수하다고 역설하는 모습은 과거 영웅 숭배적인 정치 체제 하에서의 대중 기만 방식과 닮 았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무능과 악덕의 문제가 아니다. ‘순수함’이라는 호의적인 수사(修 辭)로 사회의 모순을 미봉하려는 지도자의 이런 모습은 곧 우리 사회의 피상성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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