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봉제공장에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이제 막 여름이 지났지만, 미싱사 정미화(48) 씨는 벌써 겨울 코트를 제작하는 중이다. 정 씨는 초조한 얼굴로 두꺼운 겨울 원단을 이리저리 돌리며 재봉을 했다. 정 씨의 뒤로는 내일이면 보내야 하는 코트들이 아직도 미완성된 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정 씨는 밤을 새서라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 씨는 재작년 10월 남편 이성근(55) 씨와 함께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건물 1층을 임차해 작은 봉제공장을 차렸다. 금천구는 서울특별시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구로디지털단지와 밀접해 있는 자치구다. 보통 봉제가 유명한 곳이라면 동대문구 장안동, 종로구 창신동 등을 떠올리겠지만, 한국의류산업협회 ‘2015 봉제산업 실태조사’의 인력 현황에 따르면 금천구는 의류업체 종사자가 가장 많은 종로구 다음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실제로 과거 구로공단이라 불리던 디지털단지 일대는 70-80년대만 하더라도 봉제·섬유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을 이끌었다. 그만큼 봉제공장이 많았고 봉제업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 씨와 이 씨도 젊은 시절을 구로공단에서 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구로공단의 명성과는 달리, 그곳의 많은 봉제공장은 근로환경과 조건이 좋지 못했다. 여러 노동문학에서 등장하는 ‘구로공단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바로 남편 이 씨기도 했다. 외삼촌의 권유로 재단을 배웠던 이 씨는 돈을 벌기 위해 정 씨보다 먼저 구로공단으로 흘러 들어가, 여러 봉제공장을 오가며 재단사로 일했다. 그러던 와중 허리를 다치기도 했으나 산업재해 보상은 받지 못했다. 또, 종종 임금을 받지 못 하는 부당한 처우까지 당했다. 하지만 봉제 업무 외에는 따로 배운 기술이 없었기에 이 씨는 돈을 적게 받든, 못 받든 간에 묵묵히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부풀어 오른 고름이 언젠간 터지듯이 구로공단 속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한 근로자들은 1985년 한국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공장 밖으로 뛰쳐나와 소리쳤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노동악법 폐지하라!” 이 씨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봉제공장에서 늦게까지 일을 시키고 상습적으로 임금을 체납하는 일 따위는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러나 봉제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들에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격변하는 시대에 맥을 못 추듯 한국에서 봉제업은 소리 없이 몰락하고 있었다. 부부는 그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온몸으로 느꼈다.

많은 패션브랜드는 인건비 절약을 위해 해외에서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선호했고, 국내 생산은 주로 값이 어느 정도 나가는 옷을 제작할 때나 선택했다. “비싼 옷들은 대부분 장수가 적은데, 그거 조금 만들자고 외국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한테 내려오는 거죠. 중국산이면 품질 걱정도 될 테고.” 정 씨가 덤덤히 말했다. 부부가 현재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겨울 코트 역시 유명 브랜드에서 디자인한 고가의 옷이다. 소비자 가격은 5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비싼 옷을 만드니까 좋을 것 같죠? 그렇지도 않아요.” 50만 원짜리 코트라고 하더라도 부부에겐 단지 2만 원짜리 노동의 결과물, 그 뿐이었다. 

 

2만 원이라는 돈이 나온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면, 패션브랜드 본사와 부부에게 일거리를 가져다주는 중간 업체를 만날 수 있다. 우선 본사는 옷의 디자인을 중간 업체에 넘긴다. 이때 본사는 그들이 정한 옷 가격의 보통 10% 정도를 중간 업체에 떼어준다고 이 씨는 설명했다. 그리고 중간 업체는 원단을 디자인에 맞게 재단한 뒤, 실제 봉제 과정은 정 씨 부부와 같은 소규모 공장에 다시 하청을 맡긴다. 그렇게 봉제공장에서 제작된 옷은 중간 업체가 다시 수거해 실밥 제거, 택 부착, 아이롱(다림질) 등의 마무리 작업을 거쳐 본사로 납품된다. 따지고 보면 소규모 공장이 옷 제작에 크게 기여한 셈이니, 중간업체가 본사로부터 받은 몫의 절반은 부부가 가져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중간업체는 그 돈의 절반도 안 되는 값을 우리한테 줘요. 아무리 비싼 옷이어도 우리한테만 오면 항상 2만 원짜리로 변하더라고요.” 심지어 부부는 옷의 원가가 얼마인지조차 듣지 못할 때도 있다. 일부 중간 업체에서 가격을 숨기거나 속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얼마를 떼어먹고 주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 씨는 씁쓸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자기들도 남는 게 없다고 하니까, 믿어야지 뭐.”

그러다가 이 씨는 고민 끝에 휴대폰을 꺼내 중간 업체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이거 코트 단가 조금만 올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디자인이 너무 복잡해.” 곧이어 휴대폰 속에서 무심한 답변이 들려왔다. “어려울 것 같으면 시작 전에 미리 말을 하시지.” 이 씨는 그 말 속에 ‘너희 말고도 하겠다는 공장이 널렸다’라는 뜻이 숨겨져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결국, 이 씨는 별 소득 없이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통화를 마쳤다.

이제는 그 누구의 강요도 없지만, 부부는 과거의 여느 날과 다름없이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일한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 구로공단이 점차 개선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자인 자신의 삶도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노동은 여전히 고됐고, 그 대가는 값쌌다. “지금처럼 무겁고 까다로운 겨울 코트는 우리처럼 소규모 공장에서는 하루에 5장 정도만 만들 수 있어요. 근데 실제로 중간 업체에서 정해진 기간 안에 제작하라고 가져온 건 하루에 8장씩 만들어야 끝낼 수 있는 양이에요.” 미싱을 바쁘게 돌리는 정 씨의 눈 밑이 거뭇했다. “이걸 그 기간 안에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다른 공장은 다 했는데 왜 못하냐고 하죠.” 정 씨가 졸음을 깨기 위해 곁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가족끼리 여행을 언제 갔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요.” 봉제업계의 공정은 비체계적으로 돌아간다. 오늘 할 수 있는 양은 매번 달라지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부부가 아니었다. “할당치를 못 채우면 밤새워 일 시키던 옛날이랑 지금이 뭐가 다를까요?” 정 씨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언젠가 정 씨는 지인으로부터 공장에 왜 사람을 더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정 씨는 종일 남편과 둘이서 일해 10만 원 정도밖에 벌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데 근로자 1명을 고용하게 되면, 보통 일당 7만 원(9시간 기준)은 줘야 했다. 3명이 일하면 조금 더 벌게 된다고 하더라도, 정작 부부가 가져갈 돈은 더 적어지니 사람을 고용하는 건 무리였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미싱사 부르고 싶죠. 할 수만 있다면…” 정 씨가 졸린 눈으로 위태롭게 옷에 박음질하며 중얼거렸다. 어떤 이들은 정 씨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임금이 높아진 게 문제라며 대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 씨는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직도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봉제 노동자가 주변에 수두룩했다. 정 씨 자신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문스러웠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정 씨 부부만은 아닐 것이다. 소규모로 운영하는 봉제공장은 생각보다 많다. 국내 의류업체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인력감축을 시행했고, 그 과정에서 중견업체(50-299명)가 중소업체(20-49명)로, 중소업체가 종사자 20명 내외의 영세업체로 전환됐다. 한국의류산업협회의 ‘2015 봉제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8,505개 봉제업체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종사자 20인 미만의 영세업체의 비중이 95.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종사자 5명 미만의 가족생계형업체의 비중은 무려 75.0%를 차지했다.

부부가 이전에 다니던 중견·중소 봉제업체들도 과반수가 일거리가 없어 문을 닫거나 규모를 줄인 지 오래였다. 남편 이 씨가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봉제공장을 차리기로 한 것도, 다니던 봉제업체가 폐업을 선언하면서다. 게다가 이 씨는 허리가 좋지 않은 중년 남성인 자신을 고용해줄 곳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둘이서 작은 공장이라도 꾸려나가야 했다.

더욱이 요즘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나이를 보면, 부부처럼 40-50대가 대부분이다. “몸 어딘가가 조금씩 삐걱거릴 나잇대 사람들끼리 공장을 하는데 잘 되는 것도 이상하죠.” 이 씨가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 하면 요즘 어떤 젊은이가 이런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들겠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 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딸이 이 일 한다고 하면 내가 뜯어말리지.”

국내 봉제업계에는 신규인력이 유입되지 않아 종사자의 고령화가 진행된 지 오래다. 젊은 층의 봉제업 기피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에 조사된 전국 의류업체 종사자 4만3,080명 중에서 20대와 30대의 비중은 각각 3.2%, 8.6%로, 매우 낮은 수준을 보였다. 같은 해 금천구의 봉제업 종사자 연령도 살펴보면, 20대와 30대를 합친 수가 전체의 10%를 넘지 못했다. 반면, 40대와 50대는 각각 30%와 50%를 웃돌았다. 이 씨는 과거만큼은 아니라지만 봉제업계는 여전히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의지해오고 있으니, 배우고자 하는 이가 적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 봉제 일거리는 계속 줄어만 가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50대인 이 씨가 70대가 될 무렵에는 봉제업이 영영 모습을 감추게 될지도 몰랐다.

“저번에 보니까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봉제 일을 하면 장인 대우를 받는다던데…. 샤넬 그런 거 말이야.” 부부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봉제업을 했다. 그들은 분명 저 먼 나라에서 명품을 만들고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인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봉제는 그저 힘들고 벌이가 적은 일인데다가, 그 일을 하는 부부는 미래가 없는 사양산업의 종사자로 인식될 뿐이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 씨가 코트를 옮기면서 정 씨를 흘끗 쳐다봤다. “우리가 지금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거 맞나?” 정 씨는 남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글·사진 이지은 기자 unmethin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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