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영국에서 보낸 암살자 때문에 나는 죽어간다”라는 글을 남긴 나폴레옹은 두 달 뒤 아프리카 대륙 근처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가 남긴 글로 인해 세간에서는 독살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140여 년이 지나, 중성자 활성화 분석법이 개발되면서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이 검사대에 올랐다. 중성자 활성화 분석법은 1950년대 토론토 대학교의 저비스 박사가 개발한 방법이다. 머리카락 속 성분은 중성자에 노출될 경우 특징적인 감마선을 방출한다. 그리고 몸에서 뽑은 털은 세포 조직을 달고 있어 이 조직을 이용해 DNA(deoxyribonucleic acid) 분석을 할 수 있다. 조사 결과, 140여 년이 지난 그의 머리카락에서 정상보다 훨씬 높은 수치의 비소(독극물)가 검출됐다. 이 검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준 것은 아니었지만, 한 세기가 지난 죽음을 과학으로 재조명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는 과학적인 조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죽음의 원인이 분명하고 범인이 명백할 경우, 용의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문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치밀한 과학수사가 꼭 필요하다. ‘법의학’이라는 학문의 등장과 그에 관한 각종 드라마가 전 세계에 방영될 정도로 과학적인 수사는 범죄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중 인체가 가지고 있는 DNA는 범인을 밝히는데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인 수사법이다.
  DNA가 증거로서 법적 효력을 처음 인정받은 것은 언제일까? 과학수사가 발달한 미국은 1987년 DNA를 법적 증거물로 인정했다. 23차례의 강간을 저지른 토미 리 앤드류스는 범죄 현장의 유리창에 자신의 지문을 남겼다. 그가 범인임을 확신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가 있었음에도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이때 플로리다 주 정부의 보조 검사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여러 흔적이 모두 앤드류스가 남긴 것이라고 밝혀냈다. 하지만 피고측의 이의 신청으로 재판은 무효로 처리되었다. 그 뒤 다시 열린 재판에서 DNA 증거가 인정돼, 앤드류스는 1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DNA 분석을 범죄 수사에 어떻게 이용했을까? 사건 당시 큰 이슈거리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개구리 소년’ 사건은 국내 실종사건 최대 규모인 50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나,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2006년 공소시효 만료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그 뒤, 2002년 와룡산에서 소년들로 의심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실종소년들 어머니의 DNA와 유골의 DNA를 비교한 결과 실종소년들의 유골로 확인됐다. DNA 감정을 이용해 11년이 지난 유골의 비밀을 밝힌 것이다. 당시 경북대 법의학팀은 법의학 감정 보고회에서 개구리 소년들이 타살된 것으로 밝혔다.
  인체의 신비를 풀기 위한 궁금증에서 탄생한 DNA 분석은 범죄 현장뿐만 아니라 고고학 같은 분야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이용된다. 인체에서 나온 작은 흔적이 미궁 같은 사건의 진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DNA에 관한 연구가 나날이 발전해 가는 현재, DNA 분석은 앞으로 범죄 수사의 등대가 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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