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범죄를 변명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대표작인 <향수>에는 머리칼이 잘린 채 살해된 소녀에게서 추출된 향으로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악마적 천재 ‘그르누이’가 등장한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의 부제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이 살인자를 ‘향수의 예술가’로서 그려낸다. 물론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만 이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궁극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예술을 위해서라면 뭐든 가능하다는 걸 강변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은 뜬금없이 1985년에 출간된 <향수>라는 소설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최근 사회를 바꾸고 있는 미투운동을 통해 그간 우리에게 명작의 저자로 기억되던 예술가들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파렴치한 성범죄자로 전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향수>는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의 저자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르누이가 아니다. 그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금기되어 있는 것을(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뿐이다. 예술과 현실은 다르다. 예술가라고 해서 현실에서 틀린 행위를 하는 게 용납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투운동에 대해 중견 소설가 하일지가 한 발언은 충격적이다. 그 안에 담긴 비뚤어진 예술과 현실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을 들어 “점순이가 남자애를 강간한 거야. 얘도 미투해야겠네”라고 말한 건, 그 장면을 ‘강간’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리가 당면한 중대한 현실 사안을 예술작품을 들어 변명하는 듯한 그 인식이 더더욱 놀랍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예술을 하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예술 작품이 갖는 상상력과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윤리는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살인자를 향수의 예술가로 그리고 있다고 해서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예술가는 오히려 엄격한 삶의 금기 속에서 살아가기에, 작품을 통해 금기를 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뿐이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뭐든 면죄부를 받기도 했던 비뚤어진 유미주의적 관점은 정치와 경제에 이어 사회와 문화까지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화’로 인해 바뀌어야 할 적폐가 된 지 오래다. 제아무리 농담이라도 예술이 범죄를 변명하는 수단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