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 재수사 청원 20만 돌파
경찰, “진상조사 전담팀 꾸리고 재수사 여부 검토”

  “여기 학교 애예요. 청원 좀 부탁드립니다.” 눈발이 휘날리고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21일, 한 장년의 여성이 궂은 날씨를 뚫고 본교 월곡캠퍼스 정문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며 서 있었다. 종이에는 ‘청와대 청원 진행 중’,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 재조사해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4년 전 동생의 권유로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피해자 A 씨가 보조출연자 관리인들에게 성폭행당했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후 A 씨는 자살했고 죄책감과 충격에 시달리던 동생도 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머니 장연록 씨는 두 딸의 한을 풀기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3일, 장 씨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본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청와대 청원을 받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학생들에게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기 위해 학교 앞을 찾아갔습니다. 단역배우나 보조출연자로 활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성폭력을 당할 수 있으니,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다른 일을 하라고 알려주려고 했죠. 그렇게 며칠간 학교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어요. 학생들이 오가면서 서명에 동참해줬고 제게 음료나 핫팩을 주는 학생도 있었죠. 학교에서 1인 시위한 후 청원에 참여한 인원수가 많이 늘어났다고 느꼈어요. 학생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14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2004년 여름, 백댄서로 활동하던 작은딸이 큰딸에게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줬습니다. 동덕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에 다니며 논문을 준비하던 큰딸은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그러나 3-4개월간 단역배우로 활동하면서 딸은 점점 이상해졌어요. 평소 전혀 입에 담지 않던 욕설을 가족에게 서슴없이 내뱉고, 칼로 온 집안을 난도질하기도 했죠.


  결국, 딸은 정신병원 폐쇄 병동에 가게 됐습니다. 병원에서 상담한 결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죠. 딸이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던 보조반장 및 관계자 12명에게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처음에는 보조반장 한 명이 성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폭행 사실을 전하면서 3명이 추가로 큰딸을 성폭행했고 8명이 성추행했어요. 큰딸은 사건 발생 5년 뒤 트라우마와 분노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6일 후 작은딸도 언니가 보고 싶다며 제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도 충격으로 인해 뇌출혈로 투병하다 두 달 후 세상을 떠나게 됐어요.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난 거죠.

 

성폭력 사실을 안 후 어떻게 대응했나요
  바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우리 가족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검·경찰이 딸을 죽인 거나 다름없었죠. 사건을 담당한 조 모 형사는 근거 자료와 고소장을 제출하는 우리에게 “이거 사건 안 되는 거 아시죠”라고 몰아붙였어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돼 수사가 이뤄져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죠. 딸이 뻔히 보는 앞에서 가해자에게 성행위를 묘사하라고 시키기도 했어요. 심지어 가해자 성기의 색깔, 둘레, 길이 등을 밀리미터까지 틀리지 않도록 그려오라고 시킨 형사도 있었죠. 딸이 이런 수사를 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해자들은 조사도 거의 받지 않았더라고요. JTBC 취재 결과, 가해자들은 자택에서 우편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진술했습니다. 그릇되고 부실한 수사에 우리 가족만 울분 터진 거죠.

 

이후 고소를 취하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많은 언론에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딸이 고소를 취하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지금껏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던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딸은 살아생전 ‘자신이’ 고소를 취소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저도 고소가 취하된 사실을 검사가 직접 말해준 후에야 알게 됐죠. 저는 검사의 협박과 회유로 인해 딸이 강제적으로 고소를 취하했다고 생각합니다. 딸의 고소 취하장을 보고 이를 알 수 있었죠. 딸이 자필로 쓴 고소 취하장에는 어려운 법률 용어가 정말 많았어요. 그렇게 전문적인 단어를 많이 알 턱이 없었기에 제 딸이 그 취하장을 썼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죠.


  한편, 성폭력 피의자들의 회사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피의자 3명에게 제가 폭행을 당해 그들을 고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검사는 딸 사건의 담당 검사와 동일 인물이었죠. 딸의 고소가 취하되자 김 모 검사는 저를 불렀어요. 김 검사는 딸의 사건도 이제 정리되고 있으니 제 폭행 사건도 고소를 취소하라고 했죠. 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김 검사는 “폭행을 당했다는 진단서가 존재해도 가해자 측이 무혐의 처리되는 것은 내 펜 하나에 달려 있다”라고 했어요. 또한, 허위 사실을 신고했다는 무고죄를 적용해 제게 벌금을 물게 하면, 가족의 돈이 다 날아갈 수 있다며 협박했죠.


  그래서 저는 폭행 사건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사가 불러주는 대로 취하장을 작성했어요. 나중에 살펴보니 제 딸이 적은 고소 취하장과 제가 작성한 것의 내용이 거의 일치했습니다. 제 딸도 저처럼 협박을 받아서 자필로 고소 취하장을 썼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죠.

 

고소 취하로 소송에 실패한 뒤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한 번 취하한 형사 소송은 다시 걸지 못한다는 원칙 때문에 손해배상 목적으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어요. 재판부는 제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들어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해진 시기보다 1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억울했죠. 저는 우울증약을 하루에 40알씩 먹을 만큼 공소시효 기간에 정신이 온전치 않았어요. 이 기간을 제외하고 공소시효를 따지는 게 합리적인데, 외국과는 다르게 아직 우리 사회의 법은 발전하지 못했죠.

 

딸의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4명 중 2명이 현직에 있습니다. 그중 조 모 형사를 보기 위해 지난달 그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찾아갔어요. 사실 그동안에는 두려워서 조 모 형사를 찾아가지 못했어요. 저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할 수 있기 때문에 몸을 조심해야 했죠. 이제는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전보다 안전해졌다고 생각해서 조 모 형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조 씨는 두 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저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과거 15분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했죠. 얘기하면서 저를 어찌나 살벌하게 쳐다보던지, 그가 쏘아보는 눈빛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저는 다른 형사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조 모 형사의 지난 잘못을 나열했고, 그는 저를 명예훼손으로 신고하겠다고 했죠. 자기 얘기가 틀리면 100억을 내놓겠다고 떵떵거리기도 했어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였죠.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요
  지난달 29일, 경찰이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전담팀을 구성했어요. 이 일이 있고 나서 꿈처럼 느껴져 손등을 꼬집어보기도 했죠. 물론, 이철성 경찰청장이 재수사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하긴 했어요. 하지만 가해자에 대한 재수사와 처벌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검·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도 꼭 수사해야 합니다. 철저히 진상을 밝혀서 단죄를 내려야 하죠. 그래야 두 딸의 원혼을 달래줄 수 있고, 앞으로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청원이 7만 명을 넘어설 때, 저는 10만 명만이라도 달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만 명을 돌파해 정말 놀라웠습니다. 전 국민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울러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 죽지 마세요. 죽지 않고 버틴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어요. 죽으면 세상이 바뀌어도 그만이잖아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제발 버텨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날이 꼭 올 겁니다.


김규희 기자 kbie17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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