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대중의 관심이 필요했던 누군가는 성공했다. 구혜선과 안재현의 이혼을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이제 신체 일부를 지칭하는 용어에 집중된 양상이다. 그전에도 대중의 흥미를 끌었던 그들의 이혼 소식은 자극적인 워딩으로 인해 폭발력을 얻고 있다. 언어의 힘은 그런 것이다. 언어는 주변을 떠도는 관심과 에너지를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시키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대중이 ‘젖꼭지’에 그토록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단순히 단어의 선정성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구혜선은 자신을 피해자로 언급하는 맥락에서 위 단어를 썼지만, 이 용어는 필연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위험을 내재한다.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화제를 늘어놓는 이들의 입에서, 구혜선이 안타깝다는 그럴듯한 핑계 속에서 이 표현은 끊임없이 포르노그래피를 양산한다. 이건 사람들이 가장 즐겨 애용하는 안줏거리다. 그녀를 걱정하는 듯 말하면서 다 함께 포르노를 소비하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포르노를 즐기는 게 아니야. 그녀가 걱정돼서 말하는 거지.”

  게다가 구혜선은 사회에서 약간은 금기시되는 어떤 용어 하나를 공적으로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일종의 쾌감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이슈가 지나갈 때까지는 그 용어를 쓰지 못하는 곳에서 ‘구혜선이 이런 말을 했다더라’라는 핑계로 쓸 수 있는 약간의 자유가 생긴 것이다.

  여기에 ‘섹시하지 않다’라는 표현까지 첨가되면, 이 말은 여성들을 대동단결시키는 어떤 프레임 하나를 건드리게 된다. 그것은 ‘연인에게 성적으로 무시당하는 여성’의 프레임이다. 이 말은 오래된 연인에게 성적으로 무시 받고 버림받는 상태에 대해 여성들이 공유하는 분노를 건드린다. 잠재된 공포와 분노는 지금 안재현에게 향하고 있다. 그러니 ‘아내를 성적으로 무시하는 나쁜 남편’에 대한 대속 과정이 모두 끝날 때까지 그에 대한 비난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구혜선의 워딩을 그토록 회자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누군가는 포르노그래피로, 누군가는 저급해질 자유로, 누군가는 대속의 절차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지금 구혜선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면서까지 큰 파장을 만들어내는 모양새다. 어떤 심리인지 이해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기 어렵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부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기를 바랄 따름이다.

무명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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