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소설 『표백(漂白)』. 여태껏 20대를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선택하겠다. 이 한자어는 다음을 상징한다.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디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p77-78)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는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p191-192) 장강명은 대학 캠퍼스마저 비슷해지는 표백의 상황에서 20대들의 오색찬란한 다양성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청년들은 실제로 무엇을 한들 ‘티도 나지 않기에’ 가진 건 오직 절망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얼핏 일반적인 ‘루저상(像)’이 연상된다. 그런데 내가 이를 최고라 여기는 이유는 이 개념이 일반적 담론의 반론을 보란 듯이 극복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루저’ 논의는 가장 ‘잉여스러운’ 캐릭터, 그리고 이들의 (‘잉여’가 아니고서는 상상하지 못할, 혹은 ‘잉여’들이 너무 공감할) 삶을 등장시켜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낸다. 표정만으로도 ‘루저스러운’ 장기하와 얼굴들의 대표곡 <싸구려커피>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뭐 한 몇 년 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이처럼 사회구조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거시적인 구조에 관한 논의보다는 미시적인 희생양들을 구체적·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한결 명쾌하고 효율적이다. ‘병맛’을 구체적 담론으로 확장시킨 이병건의 웹툰 <이말년시리즈>, ‘루저’들이 어디까지 찌질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마영신의 만화 <뭐없나>, 청년실업을 만든 현실에 비수를 꼽겠다며 서울도심 한복판에서 테러를 계획하지만 그것조차 ‘똥 폼만 잡고’ 자기 혼자 처량하게 죽는 백수의 쪼그라진 삶을 그린 극단 배우세상의 연극 <서울테러>, 방송국 PD를 위해 5년이나 고시원 총무로 살면서 스스로조차도 ‘고시원화’되는 현실을 지적한 KBS드라마 <달팽이고시원>, 차마 영화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지만 더 민망한 ‘잉여’를 등장시킨 이응일 감독의 영화 <불청객>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장강명의 『표백』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루저’는 없다.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볼까? 놀라지 마시라. 삼성전자 합격자, UCLA 대학원 합격자, MBA 수석졸업자이자 대기업 CEO 아들, 공인회계사(CPA) 합격자 등 기존의 ‘잉여’들과는 ‘때깔’부터 다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자살한다. 왜냐하면 ‘거지같은 상황을 극복한 들’ 표백의 상황이 청춘들에게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눈높이를 낮춰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난감할 사람 많겠다. 88만원 세대를 잘 표현했다는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이 취업이 되지 않는 지방대 출신 한세진(정유미 역)의 고충을 잘 전개하다가 결국 취업에 성공하면서 반지하도 탈출하고 깡패도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전형적인 인생역전을 그린 것에 비해, 『표백』은 사회구조의 문제가 단순히 취업이 어렵다는 수준이 아님을 더 심층적으로 접근한다. 표백의 세상에서는 “취업하면 다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취업해보았자 달라질 게 없는 20대의 절망만이 존재한다. 취업에 영혼도 팔겠다는 20대들이여. 과연 취업후, 그렇게도 다른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표백, 이 정도면 표현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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