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내 삶의 한 부분을 예지하는 그런 글을 볼 때가 있다. 아니면, 그런 장면, 어떤 사람, 하나의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꿈에서 본 것과 같은 그런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것이 내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일 말이다.
빌리우스는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리의 광경이 하나의 흥미나 즐거움 보다는 내가 지내온 삶과 만났던 사람들을 더 떠올리게 하는 그런 때. 여행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는 그런 여정의 순간들.
어둡고 지쳐 보이는 빌리우스의 거리에서 난 약간의 미래도, 즐거운 현재도 찾을 수 없었다. 가치 있는 것이라곤 오히려 내가 읽다가 떠나온 단편 소설의 보지 못한 결말이라고 느껴졌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삶을 스쳐가듯이 난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단단한 포장도로를 딛는 내 발자국 소리와 해석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화만 없다면 오히려 더 현실처럼 느껴질 그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니, 유영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다. 그러한 움직임은. 그때, 커다란 벽이 있었다. 담장이 있고, 글이 보였다.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읽었다, 라기 보다는 상형문자처럼 그 뜻이 보였다.

‘너의 인생은 점점 더 모험으로 가득 찰 것이다’(약간의 의역은 용서하시길)

난 솔직히,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이 좋다. 대학교 신입생 때, 술과 사람으로 하루를 살아갈 때 구호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현재가 만들어내는 착실한 내일과 그 성실한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내는 희망찬 미래도 좋지만, 착실함과 성실함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운명과도 같은 그런 힘들이 난 더 좋았다. 봄부터 착실하게 가꿔온 꽃밭보다, 그 꽃이 한꺼번에 피어날 때 느끼는 어지러운 행복보다, 이 모든 기다림을 찬란한 슬픔으로 바꾸어 놓는, 취객의 구둣발이 난 더 좋았다. 어떤 사람은 불행이라고 말하며 보험처럼 다른 꽃으로 마음을 분산시키지만, 난 그 구둣발의 예기치 못하는 힘참이 좋다. 그 불규칙하고 돌발적이고 기대를 철저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이 좋다. 난 그것을 일탈이라고 부른다. 난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난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괘도를 도는 별이 단 한 번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 획 하고 하늘에 선명한 줄을 긋고 날아갈 때, 평생 그 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사람도 그 선명한 움직임과 돌연함에 자신의 희망을 걸고 미래를 그 별에 기탁한다. 그런 탈출, 그런 도피, 그런 돌연함, 이 모든 것이 만드는 별의 모험. 이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이다.
별은 그 돌연한 움직임으로 생을 다하며,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말 그대로 끝없이 떨어지지만, 그것이 삶이 아닐까?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나무에게 남은 단 하나의 일탈이 바로 사라짐이듯, 변하지 않은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생을 걸고 도약하는 모험이 아닐까?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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