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지숙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현숙
언론에 보도되는 강력범죄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폭력의 순환’, ‘폭력의 대물림’과 같은 키워드들이 연상된다. 가정 내에서의 학대로 인해 범죄의 길에 빠져든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구조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연극 <양철지붕>은 이런 현실을 처절한 리얼리즘을 통해 보여준다.

<양철지붕>은 격년제로 열리는 경기 창작희곡 공모전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코미디 상업연극 일색인 대학로에서 무겁고 진중한 리얼리즘을 다루기로 유명한 고재귀 작가의 작품이다.

언니 현숙과 동생 지숙은 공사장에서 허름한 함바집을 운영하고 있다. 일이 고되고, 공사장 인부들이 낯 뜨거운 농담을 던져도 자매는 함께하기에 행복하다. 하지만 갑자기 현숙의 옛 애인 광모가 찾아오면서 그들의 행복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광모는 자매의 과거를 비밀로 해주는 대신 자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17년 전, 자매는 살인을 했다. 자매가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의붓아버지. 의붓아버지는 지숙을 성폭행했지만, 선천적 농아인 지숙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동생이 성폭행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언니 현숙은 광모와 살인을 모의한다. 자매는 의붓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만 같았다. 둘은 살해 현장과 광모로부터 도망쳐 함바집으로 숨어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광모가 찾아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공사장 인부인 줄 알았던 성호가 의붓아버지의 아들로 밝혀지면서, 인물들의 관계는 점점 미로처럼 얽힌다. 성호의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연극의 긴장은 배가된다. 성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현숙과 지숙을 위협한다. 성호 역시 대물림되는 폭력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모와 성호로부터 위기를 느낀 현숙은 다시 한 번 더 살인을 모의한다. 자매는 성폭행 피해자에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로, 다시 광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로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자신의 숨통을 조르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가면을 덧쓴다. 자매는 언제쯤 이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까.

연극이 끝날 무렵, 자매의 삶은 안정을 되찾고 행복한 듯 보인다. 벗어날 수 없는 폭력의 굴레가 여전히 자매의 삶을 옥죄고 있어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자매의 삶은 양철지붕 같다. 양철지붕은 여느 지붕처럼 햇빛과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철지붕은 뜨거울 때는 더 뜨겁고 차가울 때는 더 차갑다.

연극의 배경인 함바집은 건설현장에 지어놓은 간이식당이다. 이곳에는 막장에 몰린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의 고된 삶이 녹아 있다. 이런 함바집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광모가 현숙을 유린하는 도중 천장에서 송충이 소리가 난다. 광모는 현숙을 내팽개친 채 천장을 바라보며 송충이에게 “우리도 벌레다”라고 외친다. 그들은 송충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 이 장면을 통해 <양철지붕>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송충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게 한다.

<양철지붕>은 극적 완성도가 높고 구성이 촘촘하게 짜여 있다. 또한 인부들의 거친 욕설과 현실적인 무대소품은 실제 함바집을 방불케 한다. 특히 비 새는 양철지붕과 인부들이 먹는 음식 냄새는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 함바집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연극은 사실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무대가 마치 현실 같고, 현실이 무대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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