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질걸린 여자(왼쪽)를 아버지(뒤 오른쪽)에게 인사시키는 청년(앞). 아버지와 아들이 주객전도 된 장면으로 묘사돼있다.

  청춘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그려낸 연극 <청춘예찬>. 이 작품은 지난 1999년 초연된 이후 이번 달 6일부터 진행 중인 앙코르 공연까지, 무려 15년 동안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은 대학로 극단 ‘골목길’의 대표 히트작, <청춘예찬>에는 배우와 연출가 그리고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의 삶이 투영돼 있다.

  겉표지에 ‘청춘예찬’이라 쓰인 책을 든 한 청년이 관객 사이를 비집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 서려 있다. 그는 퇴학위기에 처한 스물두 살 고등학생으로, 소위 말하는 문제아다. 청년에게는 술로 나날을 보내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뿌린 염산으로 눈이 멀어 안마사가 된 엄마가 있다. 그는 고달프기만 한 현실에 방황하는 한편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안부를 묻고 친구의 허위의식에 따끔한 일침을 가할 줄 안다. 불량하지만 일정한 선은 넘지 않는 청년의 모습은 왠지 모를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청년’ 역을 연기한 배우 김동원은 실제로 청년과 똑 닮은 청춘의 시기를 보냈다. 그는 학창시절, 부모 몰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반에서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를 해 ‘딱 그만큼’의 성적을 받던 그는 열정 없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을 바꿔보고자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그의 과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청춘예찬> 속 청년은 온통 잿빛인 영혼의 페이지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의 간절함은 비뚤어진 행동으로, 그리고 먹먹한 눈빛으로 조용하지만 강하게 표출된다. 이 때문에 관객은 청년이 간질을 앓고 있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동거를 제안하는 그녀에게 ‘병신’이라고 소리치고, 자신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선생에게 대들더라도 문제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청년의 모습에서 피멍으로 물든 청춘의 속내를 발견하고 함께 아파한다.

  청년이 ‘문제아’가 아닌 ‘청춘’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연출의 공이 크다. 극단 ‘골목길’의 수장이자 소시민의 일상을 무대에 사실적으로 옮기는 연출로 유명한 연출가 박근형. 그는 골목길 뒤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기 위해 무대 연출가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극에는 삶의 고달픔과 고뇌, 가족 간 애증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말투와 연기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번 작품에서 박근형은 ‘청년’이 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극적 발성과 화술을 최대한 자제하도록 요구했다. 덕분에 관객은 연극의 세계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극에 몰입할 수 있다.

  청년은 엄마를 시각장애인으로 만들고 자신의 곁에서 떠나게 한 아버지에게 무언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대항한다. 이는 간질을 앓고 있는 여자와의 동거를 선포함으로써 끝내 폭발하고야 만다. 술상 앞에서 청년은 아버지에게 울부짖으며 세상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다. 마치 절망적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구원의 손길을 청하는 듯이. 그리고 그 간절한 절규는 여자의 발작으로 허무하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청년은 정녕 자유를 갈망하며 다른 세상으로 떠났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연극 <청춘예찬>은 천장에 달린 야광별을 통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관객은 연극이 끝나고도 작품이 남긴 여운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극의 말미에 청년의 친구 용필이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빙글빙글 돌리는 장면은 생명력을 잃은 북어가 화자에게 “너도 북어지?”하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는 최승호의 시, <북어>를 연상케 한다.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이 관객 한 명 한 명을 비출 때, 관객은 “너의 청춘도 청년과 다를 바 없지?”라는 물음을 듣게 된다. 우리는 과연 이 물음에 청춘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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