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훈 영화감독

처음 영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거창하게 입문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대학 입시에서 삼수까지 했죠. 삼수해서도 대학에 못 가고 결국 군대에 갔어요. 재수와 삼수, 군대까지 긴 터널을 통과하자 영화가 보였어요. 영화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영화를 하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긴 터널의 잠복기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 남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거죠.

동덕여대 학생들도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을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긴 터널 밖으로 나가면 본인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겠죠. 아마 그 경험이 인생에서 굉장히 값진 보석과도 같은 일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러시아에서 영화를 배웠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사람들은 영화를 배우러 프랑스나 미국으로 많이 가요. 그런데 저는 다들 왜 그곳으로 가는지 의아했어요. 오히려 특이한 곳으로 가고 싶었죠. 러시아가 가진 문화적인 전통성과 다양성이 매력적이었어요. 음악에는 차이코프스키가 있고, 연극에는 스타인슬라브스키가 있고, 미술로 말하면 칸딘스키가 있고, 어느 하나 뒤처지는 분야가 없어요.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다녔던 러시아 국립 영화대학(브기크)이 세계 최초의 영화대학이에요. 그곳에서 영화를 배우면 훨씬 더 풍요로운 영화의 예술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민하지 않았어요. 또 무엇보다 극작가 체호프를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러시아로 갔어요.

 

<터치>를 제작하기 위해 사비를 털었다고 들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차를 사고 골프를 치고, 외국여행을 가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위해서 투자를 하는 것뿐이에요.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영화가 취미생활은 아니지만 삶의 일부분이니까요. 제가 단지 팔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순수하게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그저 당연한 것이죠.

 

그렇게 찍은 <터치>를 직접 상영관에서 내렸다.

그래서 더더욱 애정이 가는 작품이에요. 스스로 제 아이에게 상처를 줬으니까요. 애잔하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제 목소리를 낸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영화 상영시스템이 불공정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영화도 자본주의 논리로 굴러가죠. 그걸 몰랐던 게 아니에요. 공평과 공정은 달라요. 공평은 똑같이 분배하는 거고, 공정은 차별 없이 출발선에 서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의 영화 상영시스템은, 달리기를 하는데 저는 50m 뒤에서 뛰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어차피 저는 금메달 못 따니까 뒤에서 뛰어도 된다는 건 공정하지 못해요.

앞으로 영화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양심의 소리가 하는 말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터치> 종영 선언 후 바뀐 점이 있는지?

무언가 바뀔 것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에요. 바뀌었으면 더 좋겠지만요. 만약 노동자가 분신자살을 하면 기업이 바뀌나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학교재단 문제로 시위하기도 했는데, 재단이 물러나던가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 작업이 의미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죠. 그런 한 사람의 목소리도 누군가에겐 울림이 될 거예요. 그 덕분에 조금씩 변화가 오겠죠. 제 목소리로 한국 영화계에 조금씩 변화가 오고, 변화하려는 기류가 형성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괜찮아 울지 마>, <포도나무를 베어라>처럼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 많은데, 국내에서는 흥행하지 못했다.

외면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하나를 꼽자면, 대중이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왜 <터치>를 보고 낯설까요.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관객이 멀티플렉스에 갔는데 10개의 상영관에서 1개의 영화를 해요.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만든 것이 멀티플렉스인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죠. 영화에 여러 갈래의 출구가 없어요. 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대중은 하나의 영화에 길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게다가 해외에서 상 받은 작품이 들어와도 찾아보기가 어렵죠.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더라도 일주일 만에 내려버리거나 교차상영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외면당하게 돼요. 관객은 다시 똑같은 영화에 길들게 되고, 색다른 영화는 조금씩 낯설어져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죠.

대중의 외면이 제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죠. 그래도 영화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좋은 의미를 가지고 하는 일이잖아요? 조금 상처받았다고 해서 영화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믿음 때문에 교회에 가지는 않잖아요? 그건 너무 비열한 믿음이죠. 돈 주고 천국행 표를 사겠다는 것과 같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흥행하기 위해서 영화를 하는 게 아니니까.

 

<터치>도 그렇고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도 천주교적 요소가 많이 쓰인다.

어릴 때부터 종교가 천주교예요. 그런 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영화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해요.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니까. 제 영화에서 대부분 종교성이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미화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는 종교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 하나예요. 과연 우리 교회가, 절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가난을 구제하고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거든요. 종교단체가 부를 독식하고 비대해지면서 병폐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 영화로 가감 없이 얘기하는 거죠. <터치>에서처럼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누가 하고 있는가. 과연 종교는 그들을 터치하고 있느냐. 이런 의문을 시나리오에 투영하는 거예요.

 

시나리오부터 감독까지 두루 맡아서 한다.

시나리오를 잘 써서 제가 쓰는 것은 아니에요. 촬영현장에서 직업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 상업적인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 얘기를 하려고 영화를 하는 거니까. 제 생각을 남이 쓸 수는 없잖아요? 소설을 쓰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쓰게 하지는 않는 것과 같아요. 영화도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요. 제 기억과 생각을 제가 발현시키는 게 맞는 거죠.

 

<괜찮아 울지 마>는 우즈베키스탄이 배경이다. 한국도 러시아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첫 번째 작품 <벌이 날다>를 타지키스탄에서 찍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인 <괜찮아 울지 마>도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서 찍은 거죠. 공부했던 모스크바가 아니라 그곳까지 간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죠.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저한테는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이전에 했던 것을 우려먹으면서 영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영화는 모두 새로운 도전의 영역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리고 이야기에는 고유의 힘이 있는데, <괜찮아 울지 마>는 우즈베키스탄에 가야만 그 고유한 이야기가 살아나는 영화였어요. 어떤 사람에게 “당신, 나랑 결혼하자”고 말하면 상대는 당연히 그 이유를 물을 거예요. 이유는 간단해요. 당신이니까. 그 사람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내가 몸이 힘들고 조금 어렵더라도 그곳에 가야만 영화의 정서와 느낌이 나타난다면 그렇게 해야죠.

물론 힘들었어요.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인 제가 외국인 배우를 활용하는 부분이 만만치가 않았죠. 그렇지만 제가 힘들게 영화를 찍었더라도 관객이 영화에서 위안을 받고 좋아해 준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 혹은 영화 인생에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면?

최종목표는 없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관객 100만 명, 200만 명 이런 목표는 무의미하죠. 되면 좋겠지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목적이니까 그런 숫자에 연연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작품은 개인적인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이 가장 올바르게 투영된 작품이 제일 좋은 작품이겠죠. 악동뮤지션이 나이도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 소리를 내고 자기만의 음악을 하고, 자기가 즐거워서 음악을 하는 것처럼요. 그런 음악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듯이, 사회적인 의무감으로 채워진 영화가 아닌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영화를 하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 보면 저는 이미 꿈과 목표를 이뤄나가는 중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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