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 근심 걱정없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나전칠기(螺鈿漆器)는 광채가 나는 자개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넣거나 붙여 만드는 수공예품이다. 배금용 씨는 경기무형문화재 24호 나전칠기 기능보유자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하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다보니 경기도 무형문화재가, 대한민국 신지식이,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명예와 영광을 지닌 공예인임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만은 없다.
  배금용 씨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 남한산성 유원지에 자리한 성남시민속공예전시관 내 만정공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2000년도에 들어온 이곳이 작업장이자 전시장인 셈이다. 나전칠기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작품을 만드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린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는 작품을 많이 만들지 못했는데, 전수자가 생기면서 작품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전수자는 바로 아들 배광우 씨다. 광우 씨 외에 전수자는 지금도 없고, 이전에도 없었다. 배금용 씨는 “내가 능력이 안 되니까 월급도 못 주고,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고… 그리고 배우기도 어려워서 배우러 왔다가도 떠난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해서 나한테 배우겠다고 찾아왔던 사람도 떠나갔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배웠는데, 이걸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다들 떠나간다. 먹고는 살아야 할테니…”고 했다. 배금용 씨는 전수조교이자 아들인 배광우 씨가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일도 험하고 돈도 못 버는 직업인데 왜 하려고 하느냐고 했지만 결국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약 배광우 씨가 일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면 아마도 배금용 씨의 뒤를 이어 기술을 이어갈 사람이 없어 맥이 끊겼을 것이다.
  무형문화재인 배금용 씨에게는 정부에서 월 백만 원이 지원금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지원금도 생계지원을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재료구매를 위한 것이다. 나전칠기 작업에 필요한 옻만 4kg에 오백만 원이다. 그는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을 전수자에게 가르쳐주려 해도 재료가 있어야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는 돈 많은 집안의 사람들이, 자기 돈을 투자해가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임금이 기술자들을 궐에 들여 계급을 주며 식솔들까지 먹여 살려 주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나전칠기 기술자들을 일본에 데려갔을 때, 그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끌려갈 땐 기분이 나빴지만 부잣집 사람처럼 먹고 살게 해주고 대우를 잘 해주니 작품을 잘 만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일본의 문화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 대학생들은 ‘아이폰’ 같은 첨단기계에는 열광을 하지만 전통문화에는 영 관심이 없다. 이에 대해 배금용 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신세대들은 아예 전통에 대해 생각도 않고 주말이면 어디 맛있는 거 없나 하고 길이 막혀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지 않는가. 이리저리 놀러가야 하고, 휴가도 가고 그런 데에나 신경쓰지 전통에 대해 생각하는건 귀찮다 이거지. 간혹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외국 사람들이 좋아해” 고려 시대에 만든 물건들이 우리나라에는 한 점도 없고 외국 박물관에는 있다. 지금도 좋은 물건들은 외국에 선물로 가져가게 된다. 작품이 외국의 선물로 많이 간다면 한국을 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만든 것이 우리나라에는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기업의 문화사업,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애를 쓰는데, 전통문화에 대한 생각 없이 돈을 벌다보면 돈은 있지만 문화는 없는 것이 되지 않는가. 무형문화재들의 공방인 ‘전수회관’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 시민들이나 외국인이 관광하면 관광수입이 될 수 있지 않는가. 눈앞에 있는 것만 돈이 아니다. 멀리 봐야 하는데 왜 그러지 못하나 싶기도 하고. 지금 내가 작업장으로 있는 이곳도 남의 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2년에 한 번 씩 계약을 하는데(현재는 3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심사에서 떨어지게 되면 쫓겨나게 돼. 무형문화재를 시에서 돌봐줘야 하는 것인데…. 전수회관이 있으면 무형문화재들이 평생 쓰게 된다. 내가 죽으면 후계자들이 그리고 또 그 후계자들이. 내 선배들이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내가 하고 죽고 싶다. 시민들에게 볼거리도 제공하고… 나는 이 세상에 잠깐 와서 좋은 작품 많이 만들고 기술을 잘 전수하고 떠날 뿐인데 전수회관 짓는 것이 아깝다고, 지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무형문화재인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지원해야 하는데,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것마저도 까다롭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를 전승해오고 있는 이들인데…. 인터뷰를 마치며 배금용 씨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전칠기뿐만 아니라 전통공예에 관심을 갖고 사랑해주었으면 한다. 지금은 이런 것이 필요 없는 시대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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