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부터 시작된 외규장각도서 반환 논의는 올해 20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현재 우리 정부는 2010년 11월 11∼12일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기간에 예정된 한·불 정상회담의 기회를 살려 ‘갱신 가능한 대여’라는 프랑스 측 제의를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정부가 협상 초기의 ‘반환’ 요구에서 ‘영구 대여’로 한걸음 물러섰다가 프랑스가 ‘영구 대여’는 자국 국내법에 저촉된다며 대안으로 제시한 ‘갱신 대여’를 수용하여, 3년 또는 5년마다 다시 대여 절차를 밟아가면서라도 영구 보관해 ‘반환 효과’를 갖겠다는 실리 우선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외규장각도서 특히 의궤는 왕위의 계승을 비롯한 왕조 차원에서 특별한 목적에서 제작된 것으로, 매매나 기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부의 기본 서지류로서 영원히 국가가 보관·유지해야 하는 우리민족의 자산이라는 점에서 ‘갱신 가능한 대여’는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조선왕조의 유산, 외규장각도서

  ‘규장각(奎章閣)’은 ‘왕의 글을 보관하는 전각’이란 의미로, 숙종이 종정시(종친부) 안에 작은 전각을 지어 ‘규장각’이란 현판을 직접 써서 내리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어서(御書) 중에서 남아 있는 것들을 모아 보관토록 한 왕실도서관이었다. 이후 정조는 즉위 해인 1776년, 창덕궁 안에 국왕 직속의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을 창설하고, 규장이란 이름과 숙종의 어필 현판을 그대로 옮겨 달아 숙종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1782년(정조6) 2월, 정조는 국방상의 요충지인 강화도의 행궁 안에 규장각 외각을 짓고 규장각 수장품 중에서 영구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옮겨 보관토록 하였는데, 이것이 곧 외규장각이다.
  규장각이 관여하여 만든 서책 중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보존한 책들 중에서도 특히 의궤도서들은 왕위계승을 비롯한 각종 왕실 중요 의식에 관한 규칙과 격식, 진행과정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으로, 이는 유교정치의 산물이자 당시로서는 일련의 콘텐츠였던 셈이다.
  의궤는 어람용인 원본(原本)과 관청 보관본인 부본(副本)으로 구분하여 제작되었는데, 종이의 질, 그림 그리는 방식, 장정 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원본은 최상급 한지인 초주지(草注紙)에 정성 들여 글씨를 쓰고 아름다운 색깔로 그림을 그린 다음 암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서 놋쇠 물림(경첩)으로 묶은 것으로, 양피로 싼 서양의 고급 서적보다도 질과 품위 면에서 한 급 위여서 세계 출판문화사상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부본은 닥나무 껍질로 만든 저주지(楮注紙)에 나무나 돌로 사람이나 말의 형상을 새겨 도장 누르듯이 찍고 거기에 색칠을 하여 일반 서책과 같은 방식으로 제본을 한 것이다. 부본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람용인 원본은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문화유산으로, 서울 규장각에 원본이 두엇밖에 없는데 비해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의궤 43종은 대부분이 원본이라는 점을 통하여 약탈된 외규장각도서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외규장각도서 ‘반환’의 당위성

  병인양요 당시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은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이 있던 행궁(行宮)과 그 앞의 강화유수부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1857년(철종8)에 작성된『정사외규장각형지안(丁巳外奎章閣形止案)』을 토대로 병인양요 당시의 외규장각에 도서를 추정해보면, 퇴각하던 프랑스군은 은궤 19상자(무게 887.55㎏, 평가액 197,231프랑 36상팀)와 외규장각 비치품 359점(도서 340점, 지도족자 1점, 천문도족자 1점, 어필비문족자첩류 7점, 대리석판(옥책)6, 갑옷·투구 3점, 가면 1점)을 약탈해갔고, 이외에 왕족 신분표지물 19점, 어제·어필물 61점, 족자류 4점, 의궤도서 213종 373책, 의궤 이외의 도서 594종 4,338책은 그들의 방화로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의 방화로 외규장각도서가 전소된 것으로 인식하였고 이의 반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외규장각도서의 반출 사실은 주한 프랑스공사관 통역관 겸 서기관을 지낸 Morris Courant이 1894∼1901년에 간행한 『조선서지(朝鮮書誌)』를 통하여 처음 알려졌다. 그러나 외규장각도서는 1978년 파리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가 『조선서지』의 기록을 추적하여 파리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분관의 파손도서 창고에서 발견하기까지, 무려 백여 년을 중국도서로 분류된 채 파손도서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방치된 상태에서 조선시대 의궤 중 최상품의 하나로 국내에는 한 권도 없는 유일본인『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순조 생모 수빈박씨의 회갑연 기록)가 파리 국립도서관의 관리 소홀로 흘러 나가, 대영박물관이 1891년(고종28) 파리의 한 치즈상회로부터 ‘10파운드’라는 헐값으로 구입하였을 정도로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국제법상으로도 조선의 의궤는 제작 동기와 목적이 특별하여 일반적인 매매 또는 기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영원한 국가 소유로, 국가가 보관 유지하여야 하는 정부의 기본 서지류이므로 절대적으로 프랑스 쪽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태진 교수와 함께 외교장각 도서의 ‘반환’을 처음으로 제기한 백충현 교수의 견해이기도 하다.
  1993년 미테랑은 반환 약속과 함께 이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상권만을 전달하여 외교적으로 큰 결례를 범하였지만, 외규장각도서 반환의 정당성만은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불법 약탈한 파리 소재의 문화재를 3∼5년마다 기간을 갱신하면서 임대 전시하자는 프랑스 측 제안은, 결과적으로 병인양요의 약탈행위와 불법점유 사실의 정당성을 추인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이는 앞으로 해외에 흩어져 있는 다른 반출 문화재를 반환하는데 좋지 않은 하나의 선례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반환’의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해외 문화재 반환에 대한 우리의 자세

  문화재 반환 문제는 약탈자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우리도 문화재를 지키지 못한 책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본다. 그런 만큼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반환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의 소재와 숫자를 파악하고, 반환 요청이 가능한지 여부를 세밀히 검토한 후 불법 유출의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왕오천축국전』과 『직지심경』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원 저자는 신라승 혜초이지만,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것은 혜초 사후 120여년이 지나서 다른 사람이 쓴 것을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돈황의 천불동에서 발견하여 파리 국립도서관에 기증한 것이고, 『직지심경』은 한말의 프랑스 공사 플랑시가 수집해 간 것이 후일 경매되어 같은 도서관에 들어가게 된 경우이다. 위의 두 경우는 프랑스측이 호의로 우리에게 돌려준다면 몰라도 반환을 요구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따라서 외규장각도서를 비롯한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은 국가 차원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건 장기 프로젝트로서 기획·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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