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는 미와 추를 상징하는 소재들이 대비돼 나온다. 아로마 향초, 왈츠 음악, 춤, 시, 사랑. 그리고 성인연극, 오줌, 똥, 돈으로 산 섹스, 자살. 이 양극의 가운데에 ‘자본’이 있다. 자본은 어느 한쪽에도 속할 수 없지만 양분된 소재들은 모두 자본을 위해 존재한다. 자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역시 이러한 자본과 닮아 있다.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성인연극에서 옷을 벗는 유가인. 엄마의 병원비 때문에 창녀가 된 김성미. 한때는 학생운동을 했지만 해고 노동자가 된 전상국. 돈 때문에 다운증후군 환자들에게 성 봉사를 하는 유정숙. 그리고 학생운동 당시의 ‘남조선노동당 건설담당’이라는 직책을 이름으로 하는 남건. 20년이 흐른 뒤의 그는 자본 앞에서 동료의 아픔이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남건은 “나는 자본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런 자신의 더러움을 합리화시키려 사람을 사서 자신에게 똥을 싸달라고 요구한다. 거대 자본 앞에서 그에게 남은 인간성마저 비극이 되는 것이다.

연극은 자본 앞에서 인간이 얼마만큼 악해지는지 보여준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파국 속에 남아있는 인물의 인간성이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본이 인간을 끝으로 몰아가면, 인간은 죽거나 악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르메스>에서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부정하며 똥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만약 남건이 유가인, 전상국과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했다면 극의 치밀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김태웅 작가는 미나 추로 양분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자본을 말한다. 그러나 김태웅 작가만의 해학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아쉬웠다.

연극에서 눈물이 날 만한 장면은 많았다. 그러나 울 수 없었다. 이 뜨거운 연극에서 눈물로써 감동과 연민을 느낀다면 감상을 망칠 것만 같았다. 이 극은 끝남과 동시에 관객을 현실 속에서 <헤르메스>의 인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자본을 겨냥한 수많은 작품 중, 추함만을 등장시키지 않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작품으로 <헤르메스>를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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