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타인 혹은 타자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양의 경우도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휴먼(Human)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18세기 근대 산업혁명 이후에 마침내 ‘개인’이라는 말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타자의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의 도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근대는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전쟁과 분단을 경험하고, 60년대 4.19혁명의 좌절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바야흐로 독점적 개발주의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오랜 세월 군부가 집권하면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룬다. 그 사이에 인간을 서로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무수한 비판적 담론이 쏟아졌으나, 어디까지나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흔히 도외시해 왔던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타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무한경쟁체제의 숨 막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난 근현대의 역사에서 보듯 우리는 지속적으로 피난민처럼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압적인 체제와 살벌한 경쟁적 분위기 속에서 매순간 서로 눈치를 보며 결국 상대보다 우월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잘못된 신념에 의지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쳐버리고 말았다. 타인에 대한 윤리란 기본적으로 상대를 자신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선의와 관용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유지해야 가까스로 공동체의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타자의 윤리학이며 이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자아(존재)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모든 타인은 나’라는 당연하고도 엄연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존재는 온전히 나를 비추는 거울인 것을. 내가 곧 너이며, 결국 네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을.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사’라고 한다. 이는 서로를 의식할 겨를이 없는 피난의 시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때문에 뭔가 이미 늦었다는 체념이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체념의 끝(절망)에 다다르기 전에, 이제라도 각자 낮은 곳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인을 응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야만 먼 곳에서 반짝이는 희망이라는 낯선 별을 더듬어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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