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전 10시경, 출근을 위한 북적임이 잠잠해진 후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탑골공원에는 여느 때처럼 노인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팔각정에서 휴식을 취하는 열댓 명의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탑골공원 입구에서 이동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김 씨(70대‧남)는 “마땅히 갈 곳 없는 노인이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도서관을 찾는 노인이 꽤 많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복도는 지난여름 내내 더위를 피해 자리한 노인들, 이른바 ‘지하철 피서객’으로 붐볐다. 이에 대해 종로3가역에서 ‘어르신 행복 나눔이’라는 이발봉사를 하고 있던 이발사 A씨는 “어르신들이 시간을 보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국제 노인인권 단체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이 지난 2013년 91개국의 노인 복지 수준을 평가한 결과, 한국은 67위에 그쳤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공적연금 수급률(2012년 기준)도 34.8%로, 일본(96.4%)에 비해 크게 뒤처졌으며, 1인당 월평균 수령액은 36만 원에 불과했다. 노인 공간이 유지될 수 있는 데에는 일차적으로 사회 환경적 요소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아직 한국의 노인복지는 해결돼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문화공간이 아주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달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극장에서 열리는 제7회 서울 노인영화제가 있다. 이는 노인 활동영역의 확장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껏 노인이 문화를 소비하거나 단지 ‘참여’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서울 노인영화제는 그들이 직접 만들어나가는 행사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노인’이 주제인 영화를 노인세대와 청년세대가 함께 제작하는 단편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시작은 서울 노인복지회에서 운영하던 미디어 교육이었다. 당시 어르신들이 만든 영상을 상영하기 위해 2008년 처음으로 영화제가 개최됐다. 이후 청년세대의 참여로 발전을 거듭해 올해 7회째를 맞게 됐다.
 
 
올해 2월 ‘노인 특화’를 표방하며 개관한 청수도서관도 노년 세대가 이끌어가는 문화공간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건강검진, 직업체험센터와 연계한 네일아트, 자서전 쓰기 등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 외에도 그들이 활동의 주체가 되는 재능기부가 이뤄진다. 노인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동화 구연을 비롯해 바둑, 장기, 서예, 한자 교육 강의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 곳곳에서 노인 공간이 마련된 것에 대해 서울노인영화제 홍보 담당자 김현정 씨는 “청년세대와의 소통의 장이자, 노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도록 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 2일, 김해 회현마을에는 폐지 줍는 노인의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한 공간, ‘회현당’이 생겼다, 회현당은 국내산 참기름을 생산·판매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노인공동체의 공간이다. 이곳에 채용되는 20명의 노인은 하루 3시간씩 일을 하며, 식사와 함께 매월 20만 원의 생계비를 지원받는다. 덕분에 폐지를 주우며 지내던 독거노인이 일자리와 함께 그들만의 공간을 갖게 됐다.
 
 
서울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일대가 소일거리 없는 노인이 시간을 때우는 ‘쉼터’로서의 성격이 짙다면, 일본 도쿄에 위치한 스가모거리는 노인을 위한 ‘명소’로 꼽힌다. 스가모역 인근에 있는 상점가는 철저하게 노년 세대의 수요에 맞춰져 있다. 내복 가게, 카스텔라 상점, 약국 등 노인이 자주 찾는 편의시설로 가득하다. 느리게 작동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큼지막한 가격표나 거리 곳곳에 보이는 벤치 역시 그들을 배려한 것이다. 일본 교토의 특별 양호 시설 ‘비하라혼간지’는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위한 공간이다. 노인 1인당 33㎡(공용공간 포함)만큼의 공간을 사용한다. 이곳을 찾는 입사자는 꽃꽂이, 다도, 서예 등을 또래 노인과 함께 배우며 지루하지 않게 일과를 보낼 수 있다.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아프리카의 민속학자 아마두 함파테 바)’라는 말이 있듯, 노인이 지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는 진귀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시간을 보낼 공간이 다채로워지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내 노년을 위한, 우리 사회의 안정된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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