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우 아리랑 유랑단 단장

 2002년, 중국이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자신의 문화인 것처럼 꾸몄다. 이에 관광경영을 전공한 한 대학생이 아리랑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그와 뜻이 같은 대학생을 모아 ‘코리아 아 유(아리랑 유랑단) 레디’라는 한국문화기획패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한국문화기획꾼이라고 자청하며 세계에 아리랑과 한국 문화를 알리고 있다. 2012년에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고, 아리랑 유랑단은 이제 또 다른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려 한다. 한국 문화로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는 문현우(27) 단장을 지난 18일에 만나봤다.
 
아리랑 유랑단은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저희는 한국문화외교사절단으로서 아리랑, 한글과 같은 한국의 문화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16개국, 30개 도시를 돌며 길거리에서 공연했어요. 현지에 있는 대학교라든지 문화원과 같이 장소를 막론하고 찾아가서 세계인에게 아리랑과 한국 문화를 알리기도 했죠. 또한, 지금은 아리랑 스쿨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어요. 9월에는 아리랑 유랑단 말고도 한글 유랑단을 꾸려 중국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중국 동북공정을 계기로 아리랑 유랑단을 기획하셨다고요
 네. 2011년부터 기획하기 시작했어요. 중국 동북공정 문제에 맞서서 아리랑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준비하게 됐는데 벌써 3년이 됐네요.
 신기했던 것은, 동북공정에 맞서서 세계를 누비는 저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여줬던 사람은 중국인과 일본인이었어요. 그러면서 제 생각이 좀 바뀌게 됐어요. 우리의 아리랑이라 생각하고 세계에 알리려고만 했는데, 아리랑으로 전 세계인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아리랑 유랑단의 방향이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서경덕 교수님, 박기태 반크 단장님은 역사 왜곡을 하는 나라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시잖아요. 그런 부분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세계인과 문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단장님의 개인사도 궁금해지는데요. 어렸을 적부터 애국심이 남달랐나요
 한국 문화를 놓을 수 없는 일이 계속 생겼어요. 제가 어렸을 때 말레이시아에서 3년간 있었거든요. 외국에 나가면 없던 애국심도 생긴다고 하잖아요. 향수병에 걸리기도 하고 힘들었는데 재외동포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면서 그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어요. 또 제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요, 외할머니께서 한국 역사를 되게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일 나가시면 할머니와 함께 고인돌 유적지도 가보고, 역사적인 탐방을 많이 했어요. 그때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이 생겼고요. 아리랑 유랑단을 기획하기 전에는 대외활동도 했는데 이상하게 한국적인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어요. 태권도 댄스 같은 것도 해보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네요.
 
세계 일주를 하며 한국 문화를 어떻게 알렸나요
 아리랑 콘서트와 아리랑 스쿨. 이렇게 두 가지 콘텐츠로 한국 문화를 소개했어요. 아리랑 콘서트는 우리가 한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도 음악이 있으니까 바로 소통이 되더라고요. 아리랑 스쿨은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4대 아리랑(경기·밀양·진도·정선)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단소를 직접 불어보고 서예를 체험해 보도록 했어요.
 
아리랑 콘서트에서는 어떤 공연을 진행했나요
 4대 아리랑을 메들리로 만들어서 보여줬어요. 처음 베트남에 갔을 때는 악기가 대금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공연에서 우리나라의 장단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장단과 판소리를 할 줄 아는 단원을 데려오고, 또 보여주는 것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국무용도 콘서트에 넣고 했어요. 그렇게 부족한 점을 채워가다 보니 비로소 제가 원하는 모양이 나오게 됐죠. 관객들이 우리를 ‘걸어 다니는 한국’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한국이 통째로 왔다 간 기분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했어요.
 
당시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들의 입장에선 아리랑이 신기하잖아요. 이국적인 문화라서 그랬는지 하나라도 더 배워가려고 했어요. 아리랑을 듣고 따라 하기도 했고요. 파리에 갔을 때는 공연을 본 외국인들이 저희보다 먼저 다음 행선지로 가서 우리를 기다릴 정도였어요. 또 공연할 때, 돈통을 안 만들었거든요. 그게 없으니까 판소리 하는 친구한테 와서 손에 돈을 쥐여주고 가기도 했어요. 임시방편으로 통을 만들어봤는데 돈이 엄청나게 들어왔죠. 그때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단장으로서 힘든 시기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매번 문제의 중심이었던 것 같아요. 아르헨티나에서는 휴대폰을 소매치기당했고, 인도에 갔을 때는 피를 토하기도 했어요. 고산병으로 인해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요. 병이란 병은 다 걸리고 문제란 문제는 다 생겼었죠. 그래도 저를 믿어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그때 아리랑 고개를 넘는 것은 혼자 걷는 게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뒤에서 밀어주며 힘찬 걸음으로 오르는 것이라고 느끼게 됐어요. 제가 혼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처럼요.
 
단원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는지요
 제가 국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전국 대학교에 있는 국악과 목록을 정리한 다음에 다짜고짜 연락했죠. ‘아리랑 세계 일주를 가고 싶습니다. 귀한 인재를 추천해줄 수 있으십니까?’라고 했더니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어봐요. 안 돼 있다고 말하니까 전화를 끊더라고요. 유일하게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두 명을 추천해줬어요. 이렇게 해서 모은 친구가 6명이 됐어요. 6명이서 작년에 세계 일주를 다녀왔고, 이후 유럽원정대에선 4명의 친구와 다녀왔어요.
 
국악, 한국무용 분야의 단원을 모집하기도 하던데, 전공자만 지원할 수 있나요
 공연팀은 그렇다고 봐야죠. 그런데 공연팀 말고 비전공생인 대학생도 모집해서 재밌는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한글 보물찾기 24’라고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한글날에 우리가 정한 24곳에 자음과 모음을 숨긴 다음에, 그것을 찾은 24명에게 상품을 주는 거죠. 아직 기획 단계지만, 이처럼 누구나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아리랑 유랑단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아리랑, 한글, 태권도 유랑단 등 한국 문화와 관련된 것을 계속 만들어나갈 거예요.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소통’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의 문화로 사람들과 소통해 나가고 싶어요.
 또 우리가 아직도 한·일 관계에 대한 문제가 많잖아요. 일본 청년들과 어우러져서 조선 통신사가 걸어왔던 길을 함께 걸어가며 역사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터무니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을 지나서 만주까지 가보자는 꿈도 가지고 있고요. 꿈이니까 이 정도는 얘기해볼 수 있겠죠? (웃음)
 
동덕여대 학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요
 제가 적어놓은 말이 있어요. ‘무엇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벽한 때는 없다. 바로 지금, 저지르자!’ 이 말이 되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뭐든지 완벽하게 준비해야지만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어느 정도 계획하고 준비된 것이 있다면 바로 저지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시작하고 나서 준비해도 늦지 않은 것이 정말 많거든요. 제가 ‘완벽하게 준비해서 2년 뒤, 5년 뒤에 떠날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아리랑 유랑단이 있었을까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행하는 것, 고민은 짧고 굵게. 이것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꿈을 좇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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