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급속히 전개된 산업화과정은 사회 및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참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산업화에 따른 기계화와 분업화는 인간 신체활동의 부족을 초래하여 스포츠 참여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국제화 및 세계화에 따른 범문화적 조류와 더불어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반화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1990년대부터 선진복지국가구현을 위한 국가적 정책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권익과 지위를 향상시키는 정책이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지원 속에서 사회는 물론 가정과 같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및 역할의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스포츠의 영역에서도 여성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여성의 스포츠 참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고조되면서 여성의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참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여성스포츠는 엘리트체육 부문에서 경기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스포츠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세계적으로 경기력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생활체육 부문에서는 여가시간의 증가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생활체육참여율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즉, 스포츠 문화는 과거의 단순히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 더 나아가 ‘즐기는 스포츠’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올림픽에서 여성은 소외돼 왔다.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은 상류층 남성들만 참가한 축제였다. 고대 올림픽의 전통에 따라 제창된 제1회 아테네올림픽에서도 여성의 참여는 금지됐다. 13개국 참가선수단 311명(선수 245)은 모두 남성이었고, 여자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여자선수가 첫 선을 보인 것은 제2회 파리올림픽이었다. 당시 참가한 1077명 중 여자선수는 12명이었고, 윔블던 챔피언이었던 영국의 샬롯 쿠퍼(Charlotte Cooper)는 여자 테니스에서 우승하며 여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1928년 5월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부터 그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여자 선수들이 여럿 등장했다. 주로 여자 육상선수들이었다. 여자 육상은 100m, 800m, 400m계주,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등 5개 종목이었는데 여자 육상은 많은 논란 끝에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제9회 올림픽이 열리기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여자 육상 종목을 올림픽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자 로마 교황(Pope Pius X I)은 IOC를 비난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쿠베르탱(근대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도 육상 세부 종목에 여자부를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했었다. IOC는 반론을 극복하며 여자 육상 종목을 공식종목으로 채택했으나 올림픽 개최 기간 중에도 여성참여 논쟁은 계속됐다. 왜냐하면 암스테르담올림픽 800m 경기 결승점을 통과한 여자선수들이 모두 탈진해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논란 끝에 여자 800m 경기는 공식 종목에서 제외됐고, 암스테르담 대회 이후 32년 동안 여자 800m경기는 채택되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여자가 제외된 것은 고대의 전통 탓도 있지만 쿠베르탱의 영향도 컸다. 그는 처음부터 여성의 참여에 반대했다. 그는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여자 수영종목의 채택 논의가 일었을 때에도 “올림픽은 남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1932년 제10회 올림픽에서 전체 참가선수단 중 여성의 비율은 약 9%에 불과했다. 쿠베르탱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37년이 되어서야 “여자들이 원하면 모든 스포츠에 여성의 참가를 허용해야 한다.”는 태도 변화를 보였으나 거기에도 “여성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올림픽의 역사는 여성해방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1966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로베르타는 남자들과 함께 달려 완주한 뒤 여자임을 밝혔다. 일종의 시위였다. 그의 도전은 1974년 보스턴마라톤, 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마라톤이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포츠는 도전이고, 여성 스포츠의 역사도 도전의 역사였다.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그곳에는 ‘그녀’들이 있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농구가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탁구의 이에리사(현, 용인대 교수), 정현숙(현,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이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에는 배구가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올림픽 구기 종목으로는 처음으로 동메달,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농구가 은메달을 땄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핸드볼이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궁은 LA올림픽부터 6회 연속 단식 금메달을 따오고 있다.
  이렇게 구기 종목에서 시작된 여풍은 개인종목으로 이어졌다. 1998년 박세리가 LPGA(미국여자골프) 메이저대회인 US오픈 우승컵에 입을 맞췄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장미란이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올해 한국여성스포츠가 정점을 찍었다.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피겨, 이상화가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고, 20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3위에 올랐다. 그리고 17세 이하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우승 신화를 만들어냈다. 한국 여성 스포츠는 남자보다 늘 한 발 앞서 세계무대에서 더 뛰어난 경쟁력을 보여 왔다.
  한국의 수많은 여성선수들은 그동안 세계대회에서 남성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며 그 실력을 입증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보다 프로진출의 기회도 적고 임금수준도 낮다. 그러나 이들은 생활체육과 전문체육 영역에서 매우 귀중한 인적 자원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여성스포츠의 코치나 감독 등의 지도자로서, 여성행정가로서, 여성 스포츠 외교 전문가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폭넓은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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