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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가 과연 '웜홀' 구실을 할까요?
2014년 11월 24일 (월) 21:36:45 이상언 중앙일보 기자 ddpress@dongduk.ac.kr

이 글을 쓰고 있는 19일 오후를 기준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종합 베스트셀러 26위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올랐습니다. 31위는『 실천이성비판』, 35위는『 판단력 비판』이 차지했습니다. 어렵기로 유명한 칸트의 3대 저작이 이처럼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에 든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22위에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술의 의미를 그리스 비극을 통해 설명하는 책으로 역시 쉽게 읽기 힘든 고전입니다. 생존 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라 본 적이 없는 칸트와 니체가 저세상에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


궁금한 ‘폭풍 세일’의 여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갑자기 국민의 지적 욕구가 폭발한 것일까요? 이미 눈치챈 분이 많겠지만, 21일 시작되는 새 도서정가제 적용을 앞에 두고 벌어진 책 ‘폭풍 세일’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책을 값이 쌀 때 사놓자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 하필 칸트, 니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세 책에는 50% 할인 품목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때에는 새 도서정가제가 이미 시행되고 있겠지요. 책방(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일 뒤의 백화점처럼 썰렁한 분위기일 것이라는 예상이 어느 정도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새 도서정가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책값의 15%(현금10%, 적립 5%)를 초과한 할인을 금지하고, 정가제 적용 대상을 모든 책으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2003년부터 시행돼 온 기존의 정가제에서는 19%까지(현금 10%, 할인된 책값의 10%적립) 할인이 가능했고, 실용서와 학습서 등 적용 제외 대상이 많았습니다. 출간된 지 18개월이 지난 책들도 출판사나 책방이 마음대로 할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정가제 = 책 할인금지법

도서정가제는 그 내용으로 보면 ‘도서 할인 금지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을 파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싸게 팔 수 없도록 만든 법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상품을 싸게 팔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하는 것을 얼마나 보셨나요? 제가 아는 바로는 현재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마음대로 할인을 해 줄 수 없는 물건은 딱 세 종류뿐입니다. 신문, 책, 휴대전화입니다. 신문은 표시된 가격 아래로 팔면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합니다. 휴대전화는 그 유명한 ‘단통법’으로 보조금 액수가 제한돼 있습니다.

책값을 마음대로 못 깎아주도록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소 서점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서점, 예스24나 알라딘 같은 온라인 서점 때문에 망해가는 동네 서점을 보호하자는 취지입니다. 대규모 서점은 박리다매가 가능하니 싸게 팔 여력이 있고, 게다가 출판계의 ‘슈퍼 갑’이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애당초 동네 책방보다 싸게 책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한 대형마트에서 ‘통큰 치킨’이라는 이름을 붙여 통닭을 싸게 내놓는 바람에 동네 치킨점들이 비명을 질렀던 것 기억 하십니까? 그때는 법으로 규제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마트에 은근한 압력을 넣어 사태를 마무리했죠.

 

어두운 동네 책방의 미래

그렇다면 이제 동네 책방이 살아날까요? 아니면, 최소한 망해가는 속도가 늦춰질까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웜홀’을 통해 새로운 은하계로 이동하는 것처럼 새로운 도서정가제가 동네 책방의 미래를 열어줄까요? 저는 솔직히 말해 회의적입니다. 책을 사는 사람들이 동네 책방에 잘 안 가는 이유는 값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책방의 무료배송이 계속되는 한 동네 책방의 생존은 보장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요즘 온라인 서점의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더 큰 걱정은 책 할인 금지 강화로 책값이 비싸졌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져 책 소비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정부가 법으로 뭔가를 하려다 오히려 일을 그르친 경우를 많이 봐와서 더욱 그렇습니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의 독서 실태를 보여주는 수치를 알려드릴게요. 지난해 기준으로 한 가구당 연간 도서구입비는 1만 8,690원입니다. 책 한 권 값 조금 넘는 액수죠. <인터스텔라>에서 황사에 뒤덮인 옥수수밭을 보았을 때처럼 황량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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