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2010)』-마이클 샌델/동녘-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에는 명암이 공존한다. 우선 인간을 힘들게 하는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밝고 희망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조작하는 어두운 면도 있다. 이런 어두운 면이 나타난 이유는 유전학의 발달이 가져온 우생학의 목적자체가 유전적 구성을 통해 인간의 종을 개선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디자인해도 되는 산물로서 보는 일이 늘어난 점을 유전학적 강화의 발달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가 자연적 우연에 따라 부여받은 성격이나 재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학자 윌리엄 메이는 부모다움이야말로 ‘우연의 미래로 열린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와 닿는 까닭은 정복과 통제의 충동을 누르고 선물로 주어진 삶의 의미를 살리자는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의 말은 유전적 강화에 대해 느끼는 반감이 유전학적 강화기술이 완벽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을 알려준다. 문제는 부모가 아이를 디자인하면 아이의 자율성을 빼앗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디자인 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유전형질을 골라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탄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부모의 충동이다. 부모는 자녀를 돌볼 때 자신을 디자이너로 생각하거나 자녀를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돈을 써가며 자녀의 성별을 정하는 부모나 자녀의 지적소질이나 운동능력을 유전공학적으로 조작하려는 부모는 자식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수단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저자의 관점에서 부모는 마땅히 아이를 잘 키울 책임이 있고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게 도와줄 책임이 있다. 윌리엄 메이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은 자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자녀를 변화시키는 사랑은 자녀의 성격이나 소질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은 서로 다른 측면의 과도함을 교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야망에 찬 부모들은 자녀를 변화시키는 쪽으로 치우친다. 자녀들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강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육과 훈련을 통한 아이의 발전이 생명공학을 통한 발전과 원칙상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반면 강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이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각종 소질을 개선하려는 것은 우생학을 상기시킨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야심이 가득 찬 부모가 아이들을 만드는 방식과 우생학의 정신이 유사하다는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과잉양육은 결국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의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삶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설명한다. 우리가 삶을 주어진 선물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첫째, 우리의 재능이나 능력이 행위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전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능력을 개발하거나 그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둘째,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욕구나 처리 여하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우리의 목적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프로메테우스적인 충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고, 진정한 겸손을 배울 것이다.

유전학적 강화가 노력을 넘어섬으로써 인간의 책임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책임의 부식이 아니라 책임의 증폭이다. 아이의 소질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커질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유전적 유산의 정복자가 될수록 자신의 재능과 행동 방식에 대한 부담이 커질 것이다. 유전학적 강화는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유전학적 혁명에서 나온 부산물인데, 우리는 자신을 강화할 수 있고 우리의 아이를 디자인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포괄적인 윤리를 개발해야 하며, 생명의 개념을 확장한 ‘선물로 얻음’이라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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