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것에 대한 탐닉과 부메랑 효과

최근 일어난 이태임 사건은 놀라운 면이 있다. 이 사건의 팩트는 아주 간단하다. 그녀가 촬영 현장에서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고 그 자리에 예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촬영 현장에서 욕이란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특히, 드라마 촬영 현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감독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몇몇 악명 높은 감독은 입만 열면 욕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본래 현장이라는 것이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사람이라면 응당 욕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방송에 나온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에서 벌어진 욕 몇 마디를 두고 엄청난 소문과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한 때 공인된 파파라치처럼 연예인들의 열애설을 터트리곤 하던 한 매체가 급히 제주도까지 날아가서 이른바 ‘현장 검증’을 했다는 점이다. 만일 이런 기자정신으로 정치, 사회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면 굉장할 듯싶다. 하지만 오히려 가십에 가까운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더 대중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은 누군가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에 빠져들고 있다. 이 욕망을 전면에서 끌고 나가는 건 역시 매체들이다. 새해 벽두부터 터져 나온 이병헌과 클라라 사건을 떠올려 보라. 이들을 심층 보도한 매체는 이들의 사적인 메시지까지 모두 공개함으로써 전 국민을 사생활 관음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병헌의 메시지에 담긴 ‘로맨틱, 성공적’이라는 단어는 유행처럼 번졌고, 클라라가 회장님께 보낸 수영복 사진들의 의미를 두고 갖가지 추측으로 이어졌다.

이런 일들은 마치 ‘진실’에 대한 추구처럼 포장된다. 하지만 그 포장을 살짝 벗겨내고 나면 거기 보이는 건 오직 ‘누군가의 내밀한 사생활’이다. 도대체 이렇게 타인의 사생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여다보는 사이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라는 책에서 과거의 통제수단이 파놉티콘 형태의 자발적인 ‘감시와 처벌’로 이뤄졌다면, 지금의 통제수단은 ‘투명을 요구하는 사회’를 통해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것을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사회는 바로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모바일 메신저’가 마치 ‘알 권리’인 양 공개되고, 보는 이들 역시 거기에 대해 아무런 반발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우리가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것도 공개될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사진을 찍어 SNS에 자꾸만 올리다 보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은 점점 그 경계가 희미해지게 될 것이다. 투명사회의 공포는 여기서 비롯한다. 이 유리벽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이병헌이나 클라라, 이태임이 될 수 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 thekian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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