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뒤편 - 덕수궁 중명전

4대 궁이 있는 서울은 조선의 수도 기능을 수행했고 역사적 사건과 관련 깊다. 기자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비운의 장소 ‘덕수궁 중명전’을 방문했다.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에는 수옥헌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이면서 외국사절 접견실로 사용됐다. 또한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며, 한때 주권 회복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모의한 곳이기도 하다. 1925년 화재로 외벽만을 남기고 소실됐으나 최근 복원이 이뤄졌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은 정동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명칭은 ‘덕수궁 중명전’인데 왜 궁 밖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아관파천을 감행한다. 이때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 주변의 땅을 사들여 중명전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그 근처는 서양 열강의 공사관과 주거시설 등이 위치했다. 그래서 고종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땅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중명전은 덕수궁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궁역이 축소되며 중명전은 궁궐 밖으로 완전히 분리됐다.

1905년 일본은 고종의 예상을 벗어나 강압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중명전까지 쳐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맺었다. 고종이 직접 국새를 찍지 않았고 군대를 앞세워 강제적으로 맺어진 것이기에 정당한 조약이 아닌 ‘늑약’이라 표현한다.

이후 고종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특사 3인은 회의장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각국 대표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고 기자단이 모인 국제사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결국 나라를 뺏겼다. 황실 도서관이자 고종의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이 서린 중명전은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된다.

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중명전은 화재로 타기도 했고 건물의 용도가 수시로 변경됐다. 그만큼 다사다난했던 대한제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수호 의지가 남긴 도심 속 역사의 현장을 탐방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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