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영원성을 가진다. 작품이 탄생한 뒤 긴 시간이 흐르더라도 훗날의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과 공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에는 어떤 예술 작품이 있었을까. 어린이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동화부터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시대의 흐름을 선도했던 미술 그리고 민중의 삶과 현실을 녹여낸 희곡까지. 1920년대 예술계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들을 만나보자.

곽예은 기자 yeeun3636@naver.com
김가희 기자 skyballoon00@naver.com
김도헌 기자 heenglow@naver.com
노희주 기자 nnwriggle@naver.com


100년 전에는 어떤 동화가 있었을까?

  “옛날 옛적 어느 나라에~” 로 시작하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어린 시절 동화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던 기억은 우리들의 머릿속 한편에 남아 있다. 제목만 들어도 줄거리가 떠오를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 동화, 과연 100년 전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읽었던 작품은 무엇일까.
  1920년대의 동화 대부분은 어린이들을 사랑한 아동 문학가 방정환이 창작한 작품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호랑이 형님』이 있다. 이 작품은 나무꾼이 호랑이를 속여 살아남고, 속은 호랑이가 나무꾼의 어머니께 효도한다는 이야기다. 효의 중요성을 주제로 하는 『호랑이 형님』은 100년 후 오늘날까지도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화로 자리 잡았다. 방정환 아동 문학가의 다른 동화 『무서운 두꺼비』는 그릇을 도둑맞은 ‘능참봉’이 재치 있는 방법으로 범인을 찾는 이야기다. 도둑의 정체를 알게 된 능참봉이 그를 용서하고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사람들 간의 불화를 줄이는 삶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와 교훈적인 주제를 다뤘던 동화부터 한국어로 번안한 외국 동화 『개구리 왕자』, 『왕자와 제비』까지, 방정환이 그려낸 동화들은 100년 후인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한국 대중가요, 100년 전으로부터 시작되다

  한류 열풍 그 중심에 서 있는 K-pop의 시초는 무엇일까.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는 바로 민요가수 박채선과 이류색의 <이 풍진 세월>이다. 이 곡은 약 100년 전인 1923년, 일본축음기상회가 ‘닙보노홍’이라는 상표로 발매한 음반의 수록곡이다. 이전에도 몇몇 일본노래가 한국어로 음반에 수록된 바 있지만 <이 풍진 세월>은 조선인이 작사한 한국어 가사라는 점에서 최초의 대중가요로 선정됐다. 이 곡은 여러 노래책에서 <희망가>, <탕자 자탄가>, <탕자 경계가> 등의 제목으로 소개됐고 현재는 <희망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희망가>는 한국어 가사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위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첫 소절인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에 희망이 무엇인가’는 다소 우울하게 들린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등장한 이 가사는 당시 대중의 허탈한 마음을 달래줬다. 이뿐 아니라 뒤이어 나오는 가사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는 진정한 행복과 희망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인 <희망가>는 이후 수많은 가수에 의해 불렸고, 최근 <내일은 미스터 트롯>과 영화 <군함도>에도 등장하며 현재까지도 리메이크되고 있다. 오늘은 <희망가>의 원곡과 함께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미술 근대화의 중심에 선, 두 작가의 얼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나라엔 여러 서양화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받아왔던 서양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두 화가가 있다. 바로 고희동과 나혜석이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그는 서화협회를 결성해 미술의 근대화를 위해 힘썼으며, 미술 잡지 『서화협회보』를 창간했다. 서양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한국화로 전향한 1920년대 중반 이후에도, 그는 전통 산수화에 서양화의 기법을 접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나혜석은 1921년 국내 최초로 유화 전시회를 연 서양화가다. 소설을 통해 여성의 삶과 권리를 전면에 내세운 한편, 미술을 통해서는 다양한 풍경화를 선보인 인물이다. 나혜석의 풍경화에는 스페인과 파리 등 머나먼 국가부터, 우리나라의 도시와 농촌까지 다양한 세계가 담겨있다.
  화가의 자화상을 보면 그 삶과 시대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고희동의 자화상에서는 그가 입은 옷을 통해 전통을 고수하려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나혜석의 자화상은 무거운 분위기와 검은 옷 그리고 나혜석의 강한 표정이 특징인데, 이를 통해 삶을 향한 나혜석의 굳은 의지와 당당한 태도를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한 획을 그은 두 화백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면, 그 시대 예술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연극계의 새로운 물결, 100년 전 조선의 희곡

  오늘날 연극은 온 시민이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계층만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장르였다. 한국 희곡의 ‘과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1920년대의 연극은 어떤 내용을 담고자 했을까.
  우선 조명희 작가의 『김영일의 사』는 동경 유학생 ‘김영일’의 고난과 죽음을 다룬 작품으로, 동우회순회연극단에서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연극이다. 특히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김영일의 모습은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유학생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큰 공감을 얻었다.
  김정진 작가의 『그 사람들』 역시 식민지 조선인의 어려움을 시사하며 주목받은 희곡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소작을 부치던 땅에 철도가 놓이면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소작농의 이향을 다루고 있다. 철도 사역 꾼들의 노랫소리를 인물 간 갈등이 심화되는 장면에 삽입해 연극이 주는 현장감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돋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무대 위에 오른 희곡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그 사람들』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일제의 검열이나 극작술의 한계로 상영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도 100년 전 극작가들은 희곡이 관객들과의 소통 창구로 기능할 수 있게 노력했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중화된 연극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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