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기독교였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신이 없다면 널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냐고. 난 그 애에게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만난 거라고 타박했다. 그 친구는 그조차도 예정된 거라고 말했다. 신이 모든 걸 정해놓은 거라고.

 종교에서 기인하든 사주나 점성술에서 기인하든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안예은의 <홍연> 중 ‘당신이 어디 있든 내가 찾을 수 있게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왔다 했죠’라는 가사같이, 우리가 운명처럼 이어져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 듯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어디서나 사주를 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을 찾아가고, 운명의 상대를 내려달라며 기도를 하고, 점성술을 신봉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이런 운명론에 대해 반박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해야 할 선택으로서 나타난다.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도덕을 선택하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행동 말고 현실은 없다. 인간은 그의 행위 전체와 생활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그냥 읽기에는 무슨 말인지 모를 아리송한 말들뿐이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애인이 아주 골치 아픈 사람이라고 치자.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잠수를 밥 먹듯이 타며 무뚝뚝하기 짝이 없다. 갑자기 이 사람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만나자고 애인에게 문자를 보낸다. 헤어지자고 한 후 애인의 반응을 보고 헤어질지 말지 결정하기로 한다.

 문학가 앙드레 지드에 따르면 ‘포장된 감정과 실감된 감정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것’이다. 무뚝뚝한 애인의 곁에 머물러서 애인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결정하는 것도, 애인을 위해 머문다는 연극을 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감정은 사람이 하는 행위로써 형성된다. 감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나 자신의 행동을 밀어붙이는 진정하고 확실한 상태를 내 안에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명이라고 포장된 것은 그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당신과 당신 옆의 사람은 어떤 운명도 아니다. 다만 서로의 곁에 머무는 선택을 함으로써 서로를 좋아한다는 결정을 했을 뿐이다. 전생의 인연도 없고, 신이 예정한 운명도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과 행동만 있다. 당신은 오늘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권세인 학생 논설위원 (프랑스어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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