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고등학생들의 블랙페이스졸업사진이 화두에 올랐다. 가나 출신 연예인이 이 행위에 불쾌감을 표하면서 그 논란은 더욱 커졌다. 다수의 대중은 다름 아닌 이 연예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를 프로 불편러취급하며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차별논란이 생길 때마다 묘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혐오 발언이 문제 되면, 비하할 의도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차별의 주체가 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다.

  하지만 남성 연예인의 여성 혐오 발언에 여성들이 불쾌감을 느꼈을 때도, 흑인이 블랙페이스를 비판할 때도 사람들은 유난 떨지 말라는 태도를 내세운다. 그들은 웃으면서 넘기면 될 일을 왜 동조하지 않아서 분위기를 깨트리냐고 면박한다. 웃음이 어떻게 차별이 될 수 있냐고 반문한다.

  물론,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으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머와 장난도 많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농담은 비하성 유머. 차별의 일상화를 잘 보여주는 비하성 유머, 즉 농담의 대상은 주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차별받는 집단은 반복적으로 농담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깔보고 놀려도 되는대상으로 낙인찍힌다.

  농담이라는 이름은 폭력을 너무나도 쉽게 허용한다. 타인을 비하하고, 조롱해도 웃기려고 그랬다라는 말에 폭력은 지워진다. 그리고 웃음은 종종 동조의 의미로 쓰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웃지 않는 것이다. 약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들었을 때, 웃지 않을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연대는 함께 웃지 않는 것으로도 시작된다.

하주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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