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우리 집 장녀니까, 동생들이 네 말 안 들으면 때려도 돼.” 동생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호소하자 엄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연장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도 된다는 사고, 버릇이 없는 건 때려서 교정할 수 있다는 사고. 여기서 정작 맞는 대상인 동생들의 의사는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언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내게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수 있는 걸까? 거기엔 ‘부모는 자식을 때릴 수 있다’는 전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2016년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이 경기도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폭력허용 태도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상대방을 때리려고 위협하는 행동이 폭력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자녀의 습관 교정을 위해서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위협해도 된다고 답한 비율은 48.7%이었다.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행위가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맞을 짓’의 기준은 부모가 정하는 데다, 그 기준은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맞을 짓’은 강자에겐 통하지 않는 언어다. 예를 들어, 상대적 강자인 부모가 명백한 잘못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녀가 그들에게 ‘맞을 짓 하셨다’고 발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부모 체벌 금지법’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 체벌 금지법이 도입됐을 당시 초기의 거센 비판과 회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입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때린 적이 있다는 부모가 10%를 밑돈다. 2000년 이후에는 학대로 숨진 아이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고 있으면 결국 강자 편을 들어준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발언권 하나 내기 어려운 철저한 약자다. 친밀한 사적 공간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폭력을 당해도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향한 폭력이 일어날 때, 국가라는 공공성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동은 몸의 크기만 작을 뿐 무한한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우리와 같은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해윤 학생 논설위원(문예창작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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