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故 박원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전직 수행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피해자 고발에 따르면 박 전 시장은 2017년부터 집무실과 온라인 대화방 등에서 지속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다. 업무·고용 관계에서 벌어지는 ‘권력형 성범죄’가 수면 위로 떠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8년에는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돼, 이듬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
  권력형 성범죄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방증하는 문제다. 지난 2018년부터 2년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시정 권고 조치한 성희롱 사건의 91%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였으며, 69.1%가 ‘직접고용 상하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렇듯 여성을 대상으로 한 권력형 성범죄는 정치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형 성범죄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일각에선 ‘펜스룰’을 주장하기도 한다. 펜스룰은 미국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아내 외의 여자와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다. 이는 남성이 여성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써 성폭력 고발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 기사화될 때마다, 일부는 ‘남성 공직자의 비서로 여성을 고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펜스룰은 성폭력을 예방하는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 이는 성범죄 발생의 근원을 피해자 책임으로 돌릴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다. 또한, ‘성범죄로 고발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은 기존의 유리천장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결국, 펜스룰은 여성에게 또 다른 방식의 폭력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이전에, 가해자가 ‘위계질서에서 우위에 있는 남성’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형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차별과 배제가 아닌 사회 전반의 ‘성인지 감수성’ 증진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사회는 타인의 폭력과 가해 행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문제를 정당히 제기할 수 있는 구조로 변모해야 한다. 일상 속 존재하는 성차별을 직시하고, 성별과 권력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도헌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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