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엔 누가 있는가. 대부분은 단 3명도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493명(2020. 8. 15. 기준)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수가 적은 게 아니라 수많은 여성의 구국 활동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본지는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인 유관순 열사 외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여성 위인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을 만나, 이들의 업적과 신념을 기억하기 위해 현대 여성들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자문했다.

  여성들의 독립의식은 최초 여성인권선언서인 ‘여학교 설시 통문(여권통문)(1898)’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여권통문은 여러 인권운동의 뿌리였다. 이외에도 여성 교육기관인 순성학교 설립에 영향을 끼치며 항일의식 교육에 이바지했다. 이로써 여성들에게 참정·직업·교육권을 자각시킨 여권통문은, 훗날 이들이 이끄는 구국 활동의 기반이 됐다.

  이래 여성들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우선, 이들은 국채보상운동(1907)에 꾸준히 참여해 의연금을 모금했다. 이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송죽결사대(1913)에서 독립쟁취 방법을 토론하며 민족정신을 되새겼다. 대대적인 만세운동인 3.1운동(1919) 직후에도 이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미국, 만주 등에 이주한 부녀자들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결성했으며, 각계각층 여성들의 독립 의지를 담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반포해 항일 정신을 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 운동은 물론, 다른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는 계몽운동까지 구국 활동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거센 물결을 일궜다.

이주은 기자 flowerjueun@naver.com
장서율 기자 loveyul01@naver.com
장수빈 기자 subin5308@naver.com
최유진 기자 cyj44126@naver.com

 

 

적극적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35년간의 암흑기에서 여성들은 남성독립운동가의 보조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구국 활동을 수행했다. 이 소장은 “이들은 의열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자금 및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민족 교육을 이끌기도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외로 독립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밝혔다. 이중 직접 무장 투쟁에 나선 대표적인 두 여성독립운동가를 알아보자. 

  먼저, 국내 최초로 여성 의병장으로 활동한 윤희순이 있다. 그는 여러 의병 활동을 주도하며, 여성계몽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을미의병(1895)에서는 ‘안사람 의병가’를 작사해 여성들에게 의병 활동을 독려했으며, 정미의병(1907)에서는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안사람 의병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조국이 자주권을 잃은 이후에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전천후로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던 그는 훗날 독립운동가를 육성하는 ‘노학당’의 교장으로도 위임해 진취적인 모습으로 항일 인재 양성을 주도했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은 일제를 향해 강력한 저항 의지를 표한 여성독립운동가다. 그는 일본 총독과 전권 대사의 암살을 시도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서라면 혈서를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주 일대에서는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며, 여성의 구국 의식을 신장하기 위해 힘쓰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 투쟁의 일선에서 국가 수호 의지를 불태웠던 남자현은, 근 30년의 세월 동안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변함없는 항일 정신을 보여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다
  여성독립운동가들에게
성별은 구국 활동을 제한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보호를 책임지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며 독립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실제로 이들은 무장투쟁 외에도 여러 독립운동의 운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독립 단체에 가입해 구국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중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주요한 임무를 수행한 인물로는 누가 있을까. 

  먼저, ‘안중근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는 조마리아가 있다. 그는 여성국채보상운동단체인 삼화항은금폐지부인회에 가입해, 독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열렬히 기여했다. 그 결과 총 3,000만 원의 의연금을 모은 삼화항은금폐지부인회는 나라의 빚을 갚는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 단지 독립을 위해, 조마리아의 기부는 멈추지 않았다. 이후에도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끊임없이 후원하고, 러시아의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의 독립의식 제고에 힘썼다.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는 정정화 또한 임시정부의 존속을 위해 공헌했던 인물이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이 악화됐을뿐더러, 활동 여건도 좋지 않았다. 심지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 일은 일제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모두가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정정화가 앞장서, 임시정부에 총 다섯 번의 비밀 자금을 조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외에도 그는 다친 요원을 간호하거나 끼니를 챙기며 임시정부에서 조국의 자주를 위해 힘썼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책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시작으로, 영화 <항거>에 이르기까지 최근 여성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에 이윤옥 소장은 “그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 감개무량하면서도, 한편으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들의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사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먼저, 이 소장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국가기록원 등의 관련 기관이 협력해 여성의 구국 활동을 활발하게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교과서와 책을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연구하는 전공을 개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엔 많은 이들이 여성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대학생의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이 소장은 가장 먼저 학교에 질문해보길 권유했다. 그는 “동덕 출신은 동덕이 발굴해야죠. 학생 개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니, 학교 차원에서라도 움직여달라고 요구해야 해요”라며, 후배들이 먼저 그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전했다. 따라서 본지는 학교에 본교 출신 여성독립운동가가 있는지 문의해봤다. 이에 우리 대학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같은 법인인 동덕여고·여중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발굴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중 오정화 동문은 지난 2013년 이 소장의 도움으로 모교에 사진 및 후손에 대한 자료가 전달됐으며, 이후 동문회 자료집을 통해 후배들에게 알려졌다.

  이 소장의 말처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조사는 사소한 궁금증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주변에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젠 우리가 여성독립운동가를 찾고, 미래세대에게 그들을 소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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