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춘들에게 떠오르는 여행 방식이 있다. 바로, ‘다크투어리즘’이다. 다크투어리즘은 어둠이란 의미의 ‘다크(dark)’와 여행을 뜻하는 ‘투어리즘(tourism)’을 합친 용어로,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에서 그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취지를 지닌다. 본지 수습기자들은 이를 기억하며 우리나라의 어두운 시절이 담긴 장소를 찾아, 한국을 빛낸 주역들의 독립정신이 깃들어진 곳으로 떠나봤다.

이주은 기자 flowerjueun@naver.com
김수인 수습기자 cup0927@naver.com

김한비 수습기자 hanb02@naver.com
송영은 수습기자 syet0530@naver.com
최보영 수습기자 choiboyoung01@naver.com

 

감옥에서 외친 독립,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가장 먼저, 우리는 한국 근대사를 빛낸 인물들의 발자취를 좇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하 역사관)으로 떠났다. 1998년, 서대문형무소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개관한 역사관은 서대문독립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역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먼저 형무소의 업무를 총괄했던 보안과청사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유물과 문헌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추모의 방 사면을 가득 채운 수형기록표에선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보였다. 나이와 성별, 직업과 관계없이 조국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노고로 오늘날의 독립을 일궈냈음을 실감하자 마음이 아려왔다. 감정을 다잡고 내려간 지하 전시관의 취조실에는 물고문 장면을 재현한 모형이 놓여 있었고, 독방 안 스피커에선 그들의 절규가 흘러나왔다. 과거 고문실을 그대로 재현한 이곳은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간직한 듯했다.

  고문실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자, 옥사 외벽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외벽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했으며, 그 자국 위에 웅장한 자태의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그날의 아픔을 품고 있는 듯한 태극기를 보며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옥사로 들어갔다. 옥사 내부에선 여러 독립운동가의 기록과 유품 전시가 이어졌다. 유관순 열사부터 유성옥, 이두현 등 후손을 기다리는 이들까지, 그들의 업적을 읽으며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졌다.

  역사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향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한다면, 그들의 희생으로 지켜낸 우리나라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맺힌 우리 역사를 문화재로 접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이어, 이번에는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하 박물관)으로 향했다. 현재 박물관은 7080세대의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4층의 체험관과, 근현대사의 고난과 역경이 담긴 문화재를 전시한 5층의 역사관을 개방하고 있다. 이 중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5층 역사관으로 올라갔다.

  역사관 입구에는 ‘자유·평등·독립을 꿈꾸며’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를 보자, 당시 온 국민의 염원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역사관에선 일제의 무자비한 착취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물론, 시대상을 풍자하는 그림이나 일본 정부가 언론을 탄압한 흔적이 있는 문서들도 진열돼 있었다. 더불어, 진열된 문화재 사이사이에선 실제 일제강점기를 겪은 이들의 경험담을 풀어낸 영상 전시도 이어졌다. 덕분에 더욱 생생하게 문화재를 마주하며, 그 시기의 비극을 헤아렸다.

  박물관에서 선조들의 비통함을 절실히 느끼고 난 후 우리는 약 20분 정도를 걸어 덕수궁 후문으로 이동했다. 아관파천(1896)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용한 ‘고종의 길’에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고종의 길은 120m의 짧은 길로, 돌담으로만 둘러싸여 있어 얼핏 보면 단조로울 수 있다. 하지만, 포장하지 않은 흙바닥이 펼쳐진 모습에선 고종의 나라 잃은 슬픔을 온전히 절감할 수 있었다. 

  문화재를 통해 근현대사의 발자취를 기록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고종의 길. 선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는 화려한 ‘핫플레이스’보단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다크투어리즘을 추천하고 싶다.

남산 국치길에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되짚다
  이후 우리는 근현대사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는 ‘남산 국치길’(이하 국치길)로 향했다. 국치길은 지난 2019년, 서울시에서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되돌아보고자 조성했다.

  국치길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통감관저 터에 도착하자 직사각형 모양의 비석이 눈에 띄었다. 비석 위엔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 병합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보자,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한국의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 실감 났다. 

  한국통감관저 터의 다음 장소는 경성신사 터다. 경성신사는 과거 일본의 메이지 천황을 모셨던 신사로, 현재는 숭의여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숭의여대 본관 벽에 게시된 경성신사의 과거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니, 우리 민족이 신성시했던 남산에 일본 신을 모시는 신사를 강제로 지어야 했던 식민지인의 설움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국치길의 마지막 장소인 조선신궁 터로 향했다. 이곳은 광복 후 일제가 철거해 현재는 건물의 콘크리트 기둥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조선신궁 터의 안내판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영상을 보자, 일본이 조선신궁을 세워 참배를 강요해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짓밟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하찮게 여긴 일제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국치길을 걸으며 치욕의 장소들을 방문한 오늘, 멀기만 한 이야기 같았던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되돌아봤다. 당시의 아픔에 공감하며, 앞으로 국권 상실의 역사를 반추하며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남산에 살아 숨 쉬다
  다크투어리즘의 마지막 장소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하 기념관)이었다. 각종 유물과 자료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출생부터 국내외 활동, 순국까지 그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기념관은 지난 1970년, 일제가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세운 신사인 ‘조선신궁’ 자리에 건립돼 있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을 맞이해,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기념관을 향해 걸어갔다.

  기념관에 도착하자, 건물 입구에 그려진 웅장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바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안중근 의사의 말씀을 붓 대신 손에 물감을 묻혀 새긴 그림이었다. 왼손 약지의 첫 관절을 잘라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던 그의 강한 투지를, 그림에 새겨진 파란 손바닥이 보여주는 듯했다. 

  이렇듯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느끼며,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더욱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음성 해설을 제공하고 있었다. 관람객이 전시 앞을 지나가면, 각 주제에 해당하는 해설이 자동으로 나오는 방식이었다. 특히 1층 의병투쟁 전시를 관람할 때 재생됐던 “어진 것으로 악함을 대적한다”라는 안중근 의사의 대사는, 그가 일본 포로들을 석방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우리의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한국 독립뿐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그의 올곧은 면모에 다시 한번 감탄한 찰나였다.

  몸소 다크투어리즘을 해보니,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는 6월, 도심 속 근현대사의 현장을 찾아 나라를 위해 힘썼던 이들의 공적을 돌아보며 따뜻한 인사를 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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