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 중학교 동창과 만났다. 중학교 시절 우리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우연히 연락이 닿아 반가운 마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친구가 내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친구는 중학생 때 자기가 어떤 아이들과 싸워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 아이들이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커 친한 친구들마저 자신을 멀리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자기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걸며 같이 밥도 먹어 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가 언급하기 전까지는 몇 년간 새까맣게 잊고 지냈고,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만 날 뿐 내 머릿속에서는 선명하지 않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친구는 그날 내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 그리고 내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건넸는지까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학교폭력 사건의 심각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던 그 어떤 자극적인 뉴스보다도, 그 상황을 줄줄이 외는 친구의 모습이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친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그 고통이 지금까지도 얼마나 생생한지 나로서는 감히 지레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이나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학창 시절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속에서 방관자였던 적도 있었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 놓고 나도 모르는 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성찰하고 또 성찰했다. 

  학교폭력, 해결책이 있기는 한 걸까. 못생겨서, 가난해서, 이런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왕따를 시킨다는데,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든 인간이 이유가 있든 없든 남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 자체로도 평생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로 자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최근 학교폭력 미투를 통해 TV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연예인들을 보면서라도 깨닫는 바가 있길 소원한다. 남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짓을 하면 언젠간 자기가 그 행동을 도로 책임져야 할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길 바란다. 이렇게라도 우리 사회에서 왕따가 사라질 수 있길, 그런 날이 오길 소망한다.

박채연 학생 논설위원(프랑스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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