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고통을 가하는 기계를 이용하거나, 생리대를 차보는 체험을 통해 생리를 이해해보려고 시도하는 남성들을 SNS에서 목격한다. 이런 ‘체험’들은 생리에 대한 여성의 전방위적 고통을 일부 신체에 대한 불편함으로 축소해서 환원한다. 또한, 그 과정에 여성 개개인의 경험의 다양성은 없다. 더욱이 이러한 체험에는 생리로 인한 여성들의 경험들―이를테면 생리불순으로 인한 불안감, 생리용품의 가격 부담, 초경 때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 ‘피싸개’ 등의 여성 혐오적 표현에 대한 무분별한 노출, ‘생리컵을 사용하면 처녀막이 터질 것’과 같은 생리컵과 탐폰 사용에 대한 근거 없는 인식, 정당한 주장을 ‘생리해서 예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등 ‘생리하는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은 포함되지 못한다. 이 모든 고통은 ‘생리 체험’과 같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경험으로 즉각적으로 체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체험에는 고통에 대한 여성 당사자의 증언과 요구를 의심하는 남성 중심적 태도가 서려 있다. 그렇기에 남성들의 이런 생리 체험에서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접근방식에서부터 실패한 이와 같은 생리 체험이 ‘멋지고, 다정하고, 감사한 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생리가 이처럼 지난하고 불합리한 인정 투쟁을 겪게 된 이유는 생리가 역사적으로 혐오와 의구심의 대상이었으며, 주류 남성사회에 의해 비주류적 경험으로서 끝없이 왜곡되고 소외돼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인정 하에 이뤄지는 시혜적인 이해는 멋지지도, 다정하지도, 하물며 감사해할 것도 아니다. 단지 여성이 가졌어야 할 기본적인 권리의 회복일 뿐이다. 또한, 이런 감사하는 태도가 발생시키는 부차적 문제들은 적지 않다. 환자나 장애인이 주류의 시혜적, 제한적 이해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리는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중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진실로 도저히 존중 불가능한 것일까.

조효빈 학생 논설위원(국어국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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