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를 건네기 위해 속으로 문장을 여러 번 곱씹었습니다. 말보다는 글이 훨씬 편했던 제게 기자라는 일은 어쩌면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라는 글 형태의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할 말을 모두 잊어버릴 것만 같이 떨렸지만,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질문의 힘’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였기에 질문할 수 있었고, 또 기자였기에 내가 모르던 타인의 말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제 옆의 또 다른 삶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 감사하게만 느껴집니다.

  많이 어설펐던 제가 무사히 학보사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당시 수습기자였던 제게 탑 기사를 맡겨주시고, 앞으로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안겨주신 57기 선배님들. 언제나 가장 첫 번째로 제 기사를 읽어주시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신 58기 선배님들. 기자들의 취재를 위해 든든하게 지원해주신 교수님, 조교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문예창작과 학생입니다. 고등학교 3년에 대학교 3년을 더해 오랜 시간 문예창작에 몸담아왔지만, 학보사 기자라는 이름 아래의 저는 그곳에서 멀어지곤 했습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신간 대신 오늘 자 기사를 읽고, 노트북에는 창작 작품 대신 학보 기사 파일로 쌓여갔습니다. 이제 친구들은 저를 만나면 자연스레 ‘학보사’, ‘조판’, ‘발간’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꺼냅니다. 어떤 글을 쓰든 자꾸만 기사의 형식과 어투가 묻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 순간이 혼란스럽다가도, 결국 이곳 또한 저의 자리임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이곳과 그곳을 구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도 제 일상은 어느 해 어느 날의 어느 기사들로 가득합니다. 그때의 흔적을 지금에서야 다시 한번 돌아봤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학생들의 열기로 뜨거웠던, (509호 2면 TOP)
  개별의 삶들이 다시 모여, (520호 3면 TOP)
  연대를 통해 집단적인 힘을, (510호 6면 TOP)
  더욱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가, (523호 4면 기획)
  인간에 대한 존중과 평등을, (521호 5면 TOP)
  그리고 그 자리엔 기억과 애도가 일상화된 시민사회가. (513호 6면 르포트)

  더 멀리,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 2년 반 전에 썼던 수습기자 지원서 파일도 다시 꺼내 봤습니다. “학교 안팎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제게, 동덕여대학보가 손을 내밀어줬다”는 문장이 보였습니다. 과연 저는 학우들께 손을 내미는 기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지원서 맨 마지막 문장에는 “언제나 현재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기사를 쓰겠다”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쓰게 될 글이 설령 기사가 아닐지라도, 그때의 다짐만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늘 유효할 것 같습니다.

  지금 동덕여대 학보사에는 단 한 명의 중도이탈자 없이 굳건하게 학보를 만들어가는 정기자․수습기자 친구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 아홉 기자들이 기록하고 담아낼 세상을, 독자로서 함께 마주해나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2년 반의 시간을 기자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던 김가희 기자와 노희주 기자에게 고생 많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사람과 많은 취재를 이어오며, 우리 자신을 소개할 때 끈질기게 따라붙던 이 ‘기자’라는 이름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졌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이름을 갖게 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또다시 각자의 자리를 무사히 지켜나가리라 믿습니다.

김도헌 대학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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