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별인사〉

ⓒ교보문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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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기계와 인류의 공존 여부는 미래 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다. 편의를 위해 기계를 생산해낸 인간, 어느덧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한 기계. 두 집단의 생존 경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찾을 수 있을까. 소설 『작별인사』 속 등장인물의 선택을 두 기자의 시각에서 해석하며, 진정한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해봤다.

 

현실의 벽에서 자유를 볼 수 있는가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휴머노이드 철이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그의 인격적인 성장을 따라가며 논쟁점을 던진다. 그 시작은 철이의 납치다. ‘무등록 휴머노이드 단속법’에 의해 수용소에 끌려온 철이는 서서히 바깥 세상을 마주한다. 이는 곧 이후에 자신을 데리러 온 최 박사에게 ‘휴먼매터스 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선택은 휴먼매터스 랩이 아닌 드넓은 세계였던 것이다. 일평생 우주였던 휴먼매터스 랩을 기피하게 된 철이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철이는 휴먼매터스 랩을 벗어나 만난 재생 로봇 달마에 의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맹목적 믿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낯선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방식을 터득했다. 이는 기계로서 부여된 조건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도전으로 진정한 자아를 탐색한 결과다. 탈(脫) 휴먼매터스 랩은 철이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으나, 아직 더 생각해볼 것이 남았다. 최 박사가 철이를 포기했다면 철이는 끝까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수용소에 납치되기 전, 철이는 슬픔과 죄책감, 그 언저리에 있는 복합적인 감정 등 자신의 내부를 정의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세상과 부딪히기 전 해야 했던 일은 인류의 오랜 지혜를 배우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조롭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 없는 삶은 아무나 누릴 수 없다. 휴먼매터스 랩을 떠난 철이는 어떠했는가. 수도 없이 위험에 처했고 신체에 입력된 생존 본능을 원망했다.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했으며, 끝내 곰의 타격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정신적 성장이 과연 육신의 안온함보다 우등한 것일까. 생명체라면 필연적으로 지닌 ‘살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도 이상을 외칠 수 있을까.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한 철이는 결국 ‘사람’의 길을 택했지만, 휴먼매터스 랩에서의 ‘기계’의 삶도 그리 각박하지만은 않았을지 모른다.

최보영 기자 choiboyoung01@naver.com

 

인간과 비인간, 그 찰나의 경계를 묻다

  인간의 패멸을 추구하는 재생 로봇 ‘달마’는 말한다. “이제는 기계의 시간”이라고.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탄생된 고차원의 인공 지능은 어느덧 이들의 창조주였던 인간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새로운 존재와의 혼생으로 인간만의 세상이 사라져가는 현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설 『작별인사』는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작품 중후반부에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철이’는 기존에 자신이 살던 무균의 공간 ‘휴먼매터스 랩’으로의 복귀를 두고 갈림길에 놓인다. 철이를 제작한 최진수 박사는 철이에게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도 철이는 탱크 로봇 공격을 받는 위급한 상황에서 최 박사의 결정으로 인해 휴먼매터스 랩으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철이가 귀환 여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쉽사리 확답을 내리지 못했던 점은 생각해볼 부분이다. 철이는 강(强) 기계의 시대에 인간의 지적, 문화적 유산을 지키도록 특별 제작된 휴머노이드로, 내제된 학습의 결과라고 한들 인간처럼 사고가 가능한 존재다. 따라서 철이에게 일련의 사건을 함께 겪은 복제 인간 선이와의 우정, 연대감 혹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려는 의지는 철이 나름의 결단을 짓는데 주요한 고려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만약 외부로부터의 침공이 없었다면, 철이는 본인의 이성에 의거해 위험이 가득하지만 보다 자유로운 세상에 ‘남고 싶다’라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을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완전함 등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사유’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축적된 알고리즘, 코드의 기계적인 입출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탐색 과정이 숨 쉬듯 반복적으로 이뤄질 때 비로소 ‘인간다움’은 깨어나는 셈이다. 그렇기에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이를 계속해서 탐구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의 형상이 복제 인간이나 리얼 휴머노이드라 할지라도 인간다울 자격이 있지 않을까.

최유진 기자 cyj441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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