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났을 때 흔히 건네는 인사말, ‘안녕하세요’.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통용될 법한 이 다섯 글자가 무색해지는 공간이 있다. 바로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헬렌켈러센터다.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은 오른손으로 왼팔을 쓰다듬고 주먹 쥔 두 손을 가슴께에서 가볍게 흔들며 서로를 반긴다. 이는 수어로 ‘잘 있다’는 뜻이 있어 상대의 안부를 묻는 표현이다.

  밀알복지재단은 장애인은 물론 노인, 아동, 저소득 계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고자 설립됐다. 또한 2019년 4월에는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개인 맞춤형 복지를 목표로 헬렌켈러센터를 개소했다. 이곳에서는 시청각 장애 아동에게 촉감 교육을, 성인 시청각 장애인에게는 역량 강화 교육과 점자 교육을 비롯한 자립 훈련을 시행한다. 2021년 기준 누적 950명 정도가 헬렌켈러센터와 동행하고 있으며, 작년 한 해 76명의 시청각 장애인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기자는 시청각 장애인과 헬렌켈러센터가 남긴 발자취를 톺아보고자 직접 센터에 방문해 평범하지만 남다른 그들의 하루를 함께했다.

 

△밀알복지재단은 서울 강남구 밤고개로에 위치해 있다
△밀알복지재단은 서울 강남구 밤고개로에 위치해 있다

시청각 장애인이 처한 현실
  오전 10시, 수서역 3번 출구로 나와 고층 건물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서면 초록빛 희망을 한껏 품은 밀알복지재단 건물이 보인다. 3층 헬렌켈러센터에 도착하자 미소로 두 기자를 반기는 홍유미 센터장과 이주희 간사를 만날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탁자로 기자를 이끈 그들은 지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본교에서 진행한 ‘점자 동화책 만들기 부스’의 산물, 그림책 『똥을 뿌직』을 들고 왔다. 이는 묵자(비장애인의 글자) 위에 점자 인쇄기로 만든 스티커가 붙어 있어 시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시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교구로 사용된다. “너무 잘 쓰고 있어요.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홍 센터장은 행사에 참여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시청각 장애인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모두 있어 중증 장애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은 △지체 장애 △뇌 병변 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등을 포함해 15가지의 장애만을 정의할 뿐 시청각 장애는 단독 장애로 인정하지 않는다. 시청각 장애를 단순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홍 센터장은 본인도 처음에는 ‘시청각 중복 장애’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며 부끄러운 실수를 털어놨다. 시청각 장애인 중에는 다른 장애가 있는 경우도 존재하기에 해당 표현은 실례가 될 수 있다. 이에 센터는 시청각 장애 당사자 측의 의견을 수용해 ‘시청각 장애’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러한 문제가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은 시청각 장애 아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선천적 시청각 장애인 A 씨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완전하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청각 장애에 맞는 교육 환경이 조성돼있지 않아, 시청각 장애 아동은 필수적인 촉감 교육을 적시에 받지 못했다. 그러자 인지가 점차 도태되며 인지장애 판정을 받았고, 인지장애를 위한 재활 교육을 받게 돼 시청각 장애를 이겨내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처럼 시청각 장애인은 시각장애나 청각장애가 단독으로 있는 장애인보다 더 큰 문제에 노출돼있음에도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복지는커녕 인구 집계도 명확히 이뤄지고 있지 않다. 위와 같은 시행착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시청각 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일명 ‘헬렌켈러법’을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헬렌 켈러의 기적을 이끈 스승 설리번처럼 헬렌켈러법은 시청각 장애인의 기둥이 돼줄 예정이다.

 

△시청각 장애인 당사자들이 촉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 당사자들이 촉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의 삶을 지켜주는 홍유미 센터장의 모습이다
△시청각 장애인의 삶을 지켜주는 홍유미 센터장의 모습이다

한국인이지만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
  같은 시청각 장애인이라고 해서 일관된 증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센터에 모인 열 명 남짓한 당사자 중에선 스스로 화장실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짧은 거리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홍 센터장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는 과정부터 설명했다. “시청각 장애인은 하루아침에 시각과 청각 모두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인 혹은 청각장애인이 장애를 하나 더 얻게 되는 거예요. 시각장애가 먼저냐, 청각장애가 먼저냐에 따라 증상이 다르죠.” 시각장애가 앞선 경우에는 비장애인과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보청기를 사용하면 어느 정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에서 시청각 장애인이 된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수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한국어를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시야가 사라지기 전에 한국어를 배우더라도 능숙하게 구사하긴 힘들죠.” 한국어를 듣거나 말해본 적이 없기에 머릿속에 한국어 문법이 없다는 것이다. “저희(비장애인)에게 영어가 평생의 숙제인 것처럼 그분들에게는 한국어가 그런 느낌일 거예요.”


  센터에서는 청각장애인에서 시청각 장애인이 된 당사자를 위해 손으로 만져서 대화하는 촉수화를 교육한다. 또한 올해 4월, 농맹인복지회와 농맹인선교회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협력해 ‘촉신호’ 안내서를 만들었다. 이는 촉수화가 나타내지 못하는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덴마크 등의 외국에서 ‘햅틱 시그널’이라고 불린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점심 식사 후 프로그램실에서 본격적인 만들기 활동이 시작됐다. 수어 통역사가 책상을 두드린 뒤 손가락을 활짝 핀 채로 두 손을 머리에 붙이면 참가자들도 동작을 따라 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이 장면을 함께 바라보던 이주희 간사는 어리둥절한 기자에게 수어를 해석해줬다. “책상을 두드리는 행위는 시청각 장애인이 진동을 느껴 본인을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고, 손을 머리에 붙이는 동작은 대화를 멈춘다는 의미예요. 촉수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손을 머리에 붙이면 대화를 할 수 없으니까요.” 한 참가자는 기자가 사진을 촬영한다는 수어 통역사의 말에 수화와 짧은 구화로 “지금 얼굴이 안 좋아서 안 돼요”라며 유쾌한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탁자에 놓인 돌멩이, 사과, 소라를 천천히 손으로 더듬던 그들은 찰흙으로 실제와 매우 흡사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돌멩이의 갈라진 틈을 묘사하는 사람부터 사과를 응용해 한 입 깨문 사과를 만드는 사람, 참고 자료 없이 포도를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둘 완성되는 작품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홍 센터장이 유독 놀라운 솜씨를 보이던 참가자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랫동안 구두 공장에서 일하셨던 분이라 손이 야무지고 감각이 뛰어나세요. 시각장애가 생기면서 일을 그만뒀지만요.”


  그는 이어서 센터에서 보람을 느낀 순간을 공유했다. “이번에 시청각 장애인 당사자분을 센터에 취직시켜 드렸어요.” 2019년부터 헬렌켈러센터와 연을 이어온 시청각 장애인 B 씨는 꾸준한 훈련과 교육으로 올해 드디어 직원으로서의 능력을 갖췄다. “조건이 돼야 해요. 그만큼 준비도 많이 하셔야 하고요.” 그가 취업 열망을 드러낸 당시 단호하게 말했던 홍 센터장도 그의 눈부신 발전에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일자리를 구한 그들은 동료 상담가로 활약한다. 시청각 장애인의 경계심을 풀고 더 가까이에서 돕기 위해서다. 이들은 아직 완전히 사회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시청각 장애인에게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같이, 또 나란히
  그렇게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시각장애인을 마주쳤다. 흰지팡이를 든 그가 지하철 문을 찾지 못해 비장애인에게 안내받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센터에서 만난 이들이 떠올랐다. 시청각 장애인들이 집에만 갇혀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홍 센터장의 바람대로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이들은 점차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친구’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됐으면 한다”는 홍 센터장의 기대가 우스워지지 않도록 사회가 이들의 용기에 발맞출 수 있길 바란다.


글 최보영 기자 choiboyoung01@naver.com
사진 김다연 수습기자 redbo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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