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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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애정과 보살핌은 아이의 성장 과정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과연 본능적인 사랑은 실재할까. 그리고 미성년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의 책임은 주 양육자에게로만 국한될까. 이에 대해 두 기자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분석했다.

 

케빈이 아닌 ‘정상 가족’에 대하여

  극 중 에바는 원치 않은 출산으로 그동안 영위하던 자유로움을 잃고 도시 외곽에 정착하게 된다. 그 허탈함을 이겨낼 틈도 없이 그는 곧바로 육아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들인 케빈은 커가면서 의도적으로 벽지에 낙서하고 배변 실수를 하는 등 이유 모를 반항기로 에바를 곤란하게 한다.

  에바가 이런 케빈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남편인 프랭클린과 대화를 나눠보려 하지만, 그는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라며 이를 방관한다. 프랭클린의 방목형 태도로 부부는 아이에 대해 제대로 의논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고, 이는 케빈을 향한 수박 겉핥기식 사랑으로 이어졌다. 또한 온종일 우는 케빈을 달래고 재우느라 지친 에바와 달리 프랭클린은 육아에 소질이 있지만, 그저 보조양육자 역할에 그쳤다. 이에 따라 양육의 부담은 고스란히 에바 혼자 짊어지게 된 것이다.

  “에바는 케빈을 사랑했나?” 이 질문에 누군가는 ‘아니다’라고 단언하겠지만 기자는 ‘나름대로 사랑했다’고 답하겠다. 에바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케빈을 사랑했다. 많은 이들이 양육자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기대하지만, 에바는 그럴 여건이 조성돼있지 못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모성애는 사회적 환경에 맞게 형성된다. 에바는 본인의 불안정한 정신 건강에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의 성향, 남편의 무관심이 더해지면서 육아의 어느 한 부분도 수월하지 않은 상황을 견뎌야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케빈에게 온전한 애정과 관심을 쏟는 것은 모성애를 강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송두리째 바뀐 인생에 적응하기도 전에 예기치 못한 아이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서툰 엄마 에바와 그런 엄마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을 어긋난 방식으로 표현한 아들 케빈. 이 가족의 해체가 단지 에바 개인의 문제라고 귀결지을 수 있을까. 사회는 강요된 모성애로 고통받는 ‘모든 엄마’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케빈이 행한 대학살의 시발점이며 이들이 ‘정상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김다연 수습기자 redbona@naver.com

 

에바는 어쩌다 공범이 되었나

  하얀 집에 낭자하게 흩뿌려진 빨간색 페인트. 그리고 이를 공허하게 바라보는 에바. 영화는 아득하고 어두운 에바의 심연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후 극은 케빈이 같은 학교 학생들과 에바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살상한 사건을 기준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적으로 전개되며 관객을 서사 속으로 몰입시킨다.

  아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이후, 에바의 삶은 엉망이 된다. 남편과 딸을 잃었으며 동네에서 마주친 피해자의 가족에게 뺨을 맞고 폭언을 들어도 그녀는 고개 한 번 들지 못한 채 자리를 피하기 급급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옥죄어 오는 것은 케빈과의 기억이다. 과거 에바는 ‘엄마’로서 준비되지 않은 채 케빈을 낳아 키웠다. 아이의 탄생으로 순식간에 일상이 뒤바뀐 탓일까.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자신의 스트레스를 케빈에게 쏟아내는 에바의 발언에서 그녀의 무정(無情)을 엿볼 수 있다. 아마 에바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케빈이 벌인 살인의 원인이 바로 본인으로 인한 애정 결핍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극 중 케빈은 자신이 외로움으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은연중 계속 표현한다.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건 달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 이처럼 자신이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에둘러 전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또한 케빈은 음식을 엎는 등 계속해서 돌발행동을 보인다. 이상 행동 시에만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텅 빈 마음을 채우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성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 양육자와 아이’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맺게 되는 관계로, 애착 형성은 아이가 잘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 된다. 아이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역할에 소홀했다면, 그로 인해 빚어진 행동의 책임은 결국 양육자에게로 귀속된다. 케빈이 벌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작점은 관심을 갈구하는 몸부림이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수인 기자 cup09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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