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 트위터에서는 ‘#다음은너야03’ 해시태그가 실시간 트렌드로 급부상했다.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이 다음 해에 현역 수험생이 될 2003년생을 지목하며 만든 해시태그가 인기를 얻은 결과였다. 해시태그를 본 2003년생은 절규했고, 당해 수험생을 포함해 수능과 무관한 일부는 2003년생의 반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2021년 수능 직후에도 ‘#다음은너야04’로 변형되어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다다음은너야05’부터 ‘#넌안올거같지08’까지 몇 개년 어치를 미리 만드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 해시태그가 함유한 정서는 매우 한국적이고 익숙한 부류다. 졸업을 앞둔 초등학교 6학년이 우유 급식 선호도 설문조사에서 흰 우유를 택하거나, 졸업을 앞둔 중·고등학생이 교복 편의성 개선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3학년 학생들에게 뮤지컬이라는 15인 조별 과제를 시키곤 했다. 나는 공연을 마치고 소감을 전하는 자리에서 고생하는 친구들만 지나치게 고생하니 앞으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선생님도 아닌 동급생에게 뭔 소리야, 후배들도 해야 공평하지라며 질타받았다.

  이런 갈등은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나는 고생했는데 어딜 감히 더 편해지려 하느냐라는 심리에서 촉발된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과는 결이 다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손실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불이익을 회피하려는 명분이라도 있다. 반면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의 구조에서 현세대의 손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다음 세대가 같은 일을 겪는다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한 게 억울하면 다른 이들을 손수 스트레스 상황에 빠뜨려 다들 이 정도는 힘들다고 자위할 게 아니라, 고생시킨 사람한테 따져야 한다.

  악습을 대물림하고 타인에게 같은 고통을 안기는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공평이니 불공평이니 번지르르한 포장을 모두 걷어내면, 오로지 그릇된 기쁨을 위해 타인을 난처하게 만든다는 부끄러운 사실만이 기저에 남는다.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샤덴프로이데1)의 유혹은 강렬하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직접 만드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잊지 말자, 악습으로 건설된 사회는 사람을 가려가며 면책해주지 않는다.

1) 샤덴프로이데: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에서 느끼는 기쁨

이혜린 학생 논설위원 (문예창작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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