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노노케 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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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등장한 재앙신 타타리가미. 아시타카는 그와 싸우며 죽음의 각인이 새겨진다. 이를 없애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아시타카는 뜻밖의 인연을 마주한다. 부족의 안녕을 위해 만물의 근원인 사슴신 시시가미를 사냥하고자 하는 에보시와, 인간이지만 들개의 딸로 자라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산. 과연 그들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 <모노노케 히메>를 두 기자의 시선으로 분석해봤다.


멀고도 가까운, 인간과 자연 사이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난 타타라 마을에서 살게. 함께 살아가는 거야.”
마침내 아시타카는 산에게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살아갈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생의 관계를 이어가자는 듯 진실한 마음을 표한다. 인간을 여전히 증오하지만, 아시타카를 향한 마음만은 깊었던 산은 그제야 미소를 띠며 들개들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둘은 각자의 삶을 인정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희망을 마주했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은 멀고도 험했다. 극 중에서 자연을 상징하는 산과 인간을 대표하는 에보시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다. 둘의 증오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공포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산은 문명에 눈이 멀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공포를 느꼈으며, 에보시는 그런 자연의 한과 증오로 인간이 겪을 재앙으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그 가운데, 아시타카는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의 ‘더불어 사는 삶’을 외쳤다.

  아시타카와 산의 대화는 진정한 공존의 정의를 암시한다.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결합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경전 <논어>에 따르면 예(禮)를 실천에 옮길 때는 조화가 가장 중요하나, “조화의 중요성만 알고 예로서 절제하지 않는다면 이를 행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인간과 자연 모두가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면 각자의 삶에 집중하되 물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예’를 실천해야 한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서로의 삶을 침범할 때 붕괴한다. 태초부터 다른 삶을 살아온 자연과 인간. 두 영역 모두가 온전히 존재하면서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방법은 먹이사슬이라는 자연법칙에서 벗어나 그저 서로를 존중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 둘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고 하나의 집단으로서 삶을 영위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공존이 아니라 침략에 불과하지 않은가.

김효주 기자 hyoju0208@naver.com

 

공존이라 쓰고 이상이라 읽는다

  “함께 살 순 없는 거야?”, “함께 살아가자.” 아시타카는 끊임없이 말한다. 이는 곧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관통한다. 이처럼 영화 <모노노케 히메>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주제를 다룬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문명과 자연 중 한 측면으로 치우쳐 있다. 상반된 입장의 주인공들은 영화의 흐름을 따라 개체 간 충돌의 정당성을 쌓아나간다. 이러한 갈등 사이에서 아시타카만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상생을 꿈꾼다. 결국 각자의 신념을 놓지 못한 채 자연과 문명의 대립은 발생하고, 영화는 모두가 상처 입고 나서야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시타카가 말한 ‘함께 살아감’은 문명과 자연이 적절한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공존을 의미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군을 떠나 거시적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가 사는 생태계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른다. 필연적으로 먹이사슬의 상위 계층은 그 아래 계층을 병탄(倂呑)한다. 따라서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서 공존이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성립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문명과 자연, 어느 한쪽도 다치지 않는 유토피아를 갈구하는 아시타카의 모습은 관객에게 유의미한 울림을 남긴다. 하지만 이상만을 좇으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 공존의 개념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닌 전체적인 자연계 차원으로 치환돼야 한다. 명확한 먹이사슬 관계 속 먹고 먹히면서도 특정 개체가 멸종되지 않도록 각자의 역할을 하며 적당한 개체군을 유지하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동떨어져 살아가기보다 악영향을 불러오더라도 촘촘한 끈으로 연결돼 상호작용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김수인 기자 cup09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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