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베니스의 상인』의 등장인물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배를 담보로 거액을 넘겨준다. 약 4억8천만 원 가량의 돈을 빌려주고 안토니오가 이를 갚지 못할 경우 가슴살 1파운드를 받기로 약속한 것이다. 안토니오는 트리폴리, 인도, 멕시코, 잉글랜드 등 다른 나라로 동시에 교역하는 능력 있고 부유한 젊은 상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안토니오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장사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배’를 담보로 맡기게 됐을까? 안토니오는 딸이 가출한 상황에서도 딸의 안전보다는 그녀가 갖고 나간 패물을 더 걱정했던 구두쇠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항해를 떠나 언제 돌아오게 될지, 돌아올 수는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배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안토니오는 왜 이렇게 위험한 거래를 했을 까. 우리는 당시 해상보험제도를 통해 이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이었던 15세기에서 16세기 중세시대의 경제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금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와 상인 사이의 대금 계약에서는 배, 특히 교역의 성공 여부를 담보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계약이 당시에는 일종의 해상보험으로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안토니오가 왜 배를 담보로 샤일록에게 돈을 빌렸는가의 문제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해상보험의 발달 역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베니스의 상인』보다 훨씬 오래전에 발간된 『게스티 로마노룸』에는 14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무역상 사이에서 성행했던 해상보험 제도가 담겨있다. 그 당시부터 각자에게 부족한 물품을 타지에서 사 오는 교역이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과거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 짧게는 수일, 많게는 몇 달씩 걸렸던 물품의 운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용기 있는 상인에 의해 주도된 당시의 무역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뒤따랐고, 마차 바퀴가 부서지거나 길을 잃는 사고부터 산적이나 짐승의 습격과 같은 치명적인 위험까지 그 범위는 매우 다양했다.

특히 해상교역의 경우 그 위험도는 더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충분한 준비를 통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는 육상에서의 사고와는 달리 해상에서의 사고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해상 교역은 육상 운송보다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대량의 물건을 수송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해상교역의 위험성을 줄이는 노력을 하는 한편, 이 교역을 실행하는 상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법도 마련해 나갔다. 이에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 해상보험 제도이다.

당시 해상보험은 무역상이 대금업자에게서 사업 자금을 빌리되, 만약 태풍으로 배가 침몰하거나 혹은 해적에게 화물을 강탈당할 경우 빌린 돈은 갚지 않아도 되고, 사고가 없어 무사히 돌아오면 빌린 돈의 25-30%에 해당하는 높은 이자를 쳐서 갚는 형식이었다. 이 제도는 바빌론에서 페니키아로 페니키아에서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져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더욱 발전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이자 금지법에 따라 한동안 이 제도가 금지됐다. 이후 이자에 걸맞은 보험료를 받고, 해상에서 생긴 무역상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다시 실행됐다. 그리고 이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영국에 진출하면서 영국으로 옮아갔다. 17세기에 영국을 무대로 세계적인 해운업이 발전하면서 보험을 거래하던 많은 상인이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영국 왕실도 이러한 해상보험의 필요성을 인정해 1720년에 해상 전문보험사를 설립한다.

이후 19세기에는 북유럽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브레멘·베를린·스톡홀름·코펜하겐과 미국의 동부 해안 도시인 필라델피아·뉴욕·보스턴까지 보험회사들이 설립됐다. 결국 해상보험은『베니스의 상인』의 무대인 베네치아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 것이다.

신혜수 수습기자 shs9606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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