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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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안나는 백혈병에 걸린 언니 케이트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맞춤 아기’다. 엄마 사라는 가족의 자유를 위해 삶을 마감하려 하는 케이트를 살리고자 안나에게 지속적으로 신체적 희생을 강요한다. 과연 이러한 사라의 모습은 올바른 모성애로 인식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한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를 두 기자가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태어난 지 두 해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은 케이트. 엄마 사라는 그런 딸을 위해 골수, 줄기세포 등을 이식해 줄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태어나 군말 없이 자신의 것을 넘겨주던 안나는 열한 살, 처음으로 신장 기증 거부 의사를 밝힌다. 게다가 ‘몸의 권리’를 외치며 사라를 설득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한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들의 갈등은 돌고 돌아 올바른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영화는 ‘원래 그래왔다’라는 이유로 한 생명이 희생되는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안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케이트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사라는 그의 첫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안나가 배신을 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상황을 곧이곧대로 평가하긴 이르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이 복잡한 소동의 전말을 알 수 있다. 안나의 고소는 단순히 자기 몸을 지키고 싶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사실 신장이식을 거부해 달라는 케이트의 부탁으로 시작된 것이다. 가족들은 아픈 케이트를 돌보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려왔다. 엄마인 사라는 직업을 포기했으며 오빠인 제시의 난독증은 너무 늦게 발견됐다. 안나는 오로지 케이트를 위해 태어나 신체 일부를 기증해 왔고, 신장 기증까지 한다면 치어리더의 꿈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나 케이트는 가족이 자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희생하길 바라지 않았다. 본인보다도 더 본인을 위하는 가족들, 특히 사라를 보며 케이트가 느꼈을 감정은 충만함과 만족감보다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라가 케이트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다소 극단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런 사랑은 되려 사랑을 받는 당사자인 케이트마저 고통스럽게 한다. 아무리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한들 일방적이고, 한 생명의 존엄성까지 해치는 사랑은 바람직할 수 없다. 케이트는 가족들이 희생적인 사랑이 아닌 건전한 사랑을 하며 행복하길 바랐을 것이다.

진효주 수습기자 hyoju_press@naver.com

괜찮아, 사랑이야

  “난 내 아이를 죽게 놔두지 않아, 절대로!” 엄마 사라가 자신을 상대로 고소한 안나에게 소리치며 하는 말이다.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처절한 절규다. 케이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오직 아기를 낳는 일이었다. 결국 사라는 아픈 케이트를 치료하기 위해 ‘맞춤 아기’ 안나를 낳고, 병간호에 온 힘을 쏟아붓는다.

  그렇게 안나는 아픈 언니를 위해 살아가다 돌연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신장 이식을 거부하며 엄마 사라를 고소한다. 이에 사라는 평소와 다른 안나의 행동에 당황하고 만다. 안나의 역할은 뇌사 환자의 인공호흡기와 다름없었다. 딸의 죽음을 눈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사라는 엄마로서 뭐든 하고자 했다. 극 중 사라는 딸에게 주어진 비극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안나 또한 사라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케이트를 위한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여겼다. 11살이란 어린 나이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사려가 깊었다. 오히려 안나는 자신이 케이트를 살릴 수 있는 건강한 몸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이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렇기에 죽음을 선택한 것과 다름이 없던 언니의 부탁에도 순순히 응했다. 그는 병상에서 평생을 살아온 언니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결국, 케이트는 본인의 뜻대로 숨을 거둔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라는 케이트를 위해, 케이트는 안나를 위해, 안나는 케이트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필연적으로 타고난 가족이란 관계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그 사정을 헤아릴 수도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사라의 모성애가 어긋났다고 말할 수 없다. 안나가 그간 행해온 모든 것을 한낱 희생이란 이름으로 폄하할 수도 없다. 닥쳐오는 케이트의 불행을 바라만 보기엔 그들은 서로를 너무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보리 수습기자 dlqhfl6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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