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신 세종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난다. 그리고 책도 읽을수록 맛이 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영원한 마음의 양식(糧食)은 책이다. 최근 들어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 등 구독형 도서 플랫폼이 대성하며 책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졌다. 이 같은 전자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요즘. 그간 잠시 밀어뒀던 종이책의 소중함을 느껴보고자 기자들이 나섰다. 출판사로 시작해 인쇄소, 서점, 헌책방까지. 종이책의 탄생, 소멸, 부활을 함께해 봤다. 오늘 하루만은 전자기기는 내려놓고 책 향기를 맡으며 사각거리는 종이의 질감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송영은 기자 syet0530@naver.com
김다연 기자 redbona@naver.com
이보리 수습기자 dlqhfl68@naver.com
진효주 수습기자 artcs1004@naver.com

 

​△ 출판사 안온북스의 초판본들이 모여있다
​△ 출판사 안온북스의 초판본들이 모여있다

종이책이 탄생하기까지

  종이책은 직접 책을 들춰보며 어떤 것을 읽을지 고르고, 페이지를 차례차례 넘기는 과정에서 많은 감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풍부한 지식을 담는 ‘보고’인 종이책은 디지털 콘텐츠의 확대로 우리와 점점 멀어져 간다. 본지는 종이책의 가치를 되짚어보기 위해 출판사 ‘안온북스’의 이정미(문예창작 99 졸)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며 전반적인 인쇄업계의 상황을 살펴봤다.

  “평상시 기획은 아주 시의적인 대화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종이책의 출판 과정에 대해 묻자, 이 대표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기획 회의를 통해 출간하고자 하는 책의 기본적인 틀이 구성되면 이에 적합한 작가를 찾는다. 이후에 원고가 들어오면 초기 설정한 방향에 부합하는지 파악하는 등 여러 차례의 검토와 수정 끝에 ‘완고’를 만들어 낸다. 원고가 완성되면 본격적인 편집 작업에 들어간다. 교정 및 교열 작업으로 원고를 다듬는 동시에 △사진 자료 △작가 연보 △추천사와 같은 부속 원고를 받아 책에 포함하는 과정 또한 편집 작업 중 하나다. 이 단계가 마무리되면 비로소 인쇄소에 출력을 맡긴다.

  출판사에서 숱한 검수를 거친 원고가 도착하면 인쇄소의 기계는 분주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천, 수만 권을 대량생산 해내는 이곳에서는 주로 ‘오프젯 인쇄기’를 사용해 책을 만들어 낸다. 금속판에 고무 롤러를 붙인 후 잉크를 부으면, 롤러가 작동하며 잉크를 얇게 펴내면서 종이에 입혀지는 방식이다.

 

​△ 종이책이 되기 전 접지를 마치고 정합의 과정에 있는 모습이다
​△ 종이책이 되기 전 접지를 마치고 정합의 과정에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지면이 하나둘 인쇄되면 드디어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일반적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서 지면을 한 장 한 장 인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큰 전지 한 장에 여러 쪽을 한꺼번에 출력한 후 이를 접는 ‘접지’, 하나로 모으는 ‘정합’의 과정을 거친다. 이를 표지와 합쳐 접힌 면을 모두 잘라내면 마지막 과정인 ‘제책’이 완료돼, 마침내 책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한편 출판사는 여전히 분주하다. 원고가 손을 떠난 후에도 출간을 알리는 보도자료 작성 및 신간 알림, 이벤트 등의 마케팅 활동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책은 오랜 과정을 거쳐 독자들의 손에 들어온다.


“단군 이래 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

  그러나 쉴 틈 없는 노력의 결정체인 종이책은 그 빛을 충분히 발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은 47.5%로, 감소하는 추세다. 이 대표는 “출판업계 사람들끼리 ‘버텨낸다’는 말을 인사말처럼 한다”며 독서율의 감소를 절감한다고 전했다.

  이와 더불어 종잇값 또한 복병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작년 초까지만 해도 1t당 675달러였던 펄프값이 작년 8월에 1,030달러까지 급등했다. 이러한 원자재 가격은 2023년부터 점점 하락해 올해 8월 620달러까지 떨어졌으나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이런 하락 폭을 쉽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2022년 한 해 동안 최대 6.6%까지 오른 생산자물가지수는 2023년 7월 기준 전년 대비 0.7%의 감소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도서 가격을 올리는 게 온당했으나 책은 소비자 가격저항선이 낮은 품목이기에 가격 인상 또한 쉽지 않다.

  종잇값의 상승뿐 아니라 기본적인 도서 매출을 보장해 주는 도서관의 예산 부족에 따른 어려움도 존재했다. 여러 도서관이 한 권의 책을 상호대차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정부가 60억 원 규모로 지원하던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예산을 내년에 전액 삭감하기로 했다. 이에 많은 이들은 출판사를 비롯한 도서 관련 업계 전반의 난항이 지속될 것을 예상했다.
 

그래도, 종이책을 위해서

  이런 난관 속에서도 출판업계는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중 ‘리커버 에디션’은 증쇄할 때 책의 표지를 새로 바꾸는 것으로,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동네책방 에디션’도 있다. 이는 동네책방에서만 파는 책을 따로 제작하는 것으로, 소규모 유통업체에 경쟁력을 높이며 다양한 유통업체를 확보하기에 이롭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요즘 서점들을 각자의 색깔이 뚜렷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고, 동네책방 에디션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 또한 긍정적이기에 좋은 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밖에도 섬세하게 독자를 고려해 저시력자나 노인에게 접근성을 높인 판형인 ‘큰글자도서’를 비롯한 웹진의 활용 또한 눈에 띈다. 웹진은 웹페이지상에서 잡지 형태로 글을 선보이는 것인데, 이는 추후 종이책으로 제작될 수 있는 원고가 되기도 한다. “종이책을 위해서 독자와 원고를 모으는 연결고리라고 생각해요.” 이 대표가 말하는 오늘날의 웹진은 끝내 종이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징검다리가 됐다. 이처럼 출판사는 종이책으로 다가가는 독자를 늘리고자 여러 방면에서 고민하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중이다.
 

읽지는 않지만 좋아는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잉크, 종이는 정성으로 한데 뭉쳐 책이 된다. 이들은 잉크 마를 새 없이 대형 서점으로 이동해 진열대에 오른다. 전자책의 흥행도 대형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예전부터 이곳은 누군가의 약속 장소였으며, 만남의 광장으로 꼽혔다. 실제로, 광화문역 3, 4번 출구 인근에 자리한 교보문고에는 늘 저녁까지 많은 이들이 붐볐다.

  단순히 ‘향’을 맡기 위해 서점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도 많다. 이러한 수요에 힘입어 2017년 10월부터 교보문고는 ‘책향(The scent of page)’이 나는 향초, 디퓨저, 차량용 디퓨저, 책갈피 등을 판매했다.

  이밖에도 사람들은 종이책과 관련한 ‘것’들에게 유독 관심이 많았다. 그 중심에는 ‘에코 퍼블리시1)’가 있다. 출판계 역시 친환경성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이 부쩍 는 까닭에서다. 대표적인 예로는, 산림관리협회 인증을 받은 친환경 종이로 속지를 꾸리거나 고지율 20% 이상의 우수재활용(GR) 종이로 표지를 만드는 것이 있다. 책에 띠지나 코팅을 따로 하지 않는 것도 실천 중 하나다. 지난 6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출판진흥원)은 ‘탄소 제로와 종이책의 미래’를 주제로 <2023 제2회 열린 포럼>을 열어 친환경 출판을 독려하기도 했다. 
 

책책책 종이책을 읽읍시다

  책향의 정식 상품화를 추진했던 교보문고 고객 마케팅 담당자 김성자 씨는 “책향이 집안에 스며들듯이 독서 활동도 생활 곳곳에 스며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독서량은 바닥을 치고 있다. 특히 종이책 독서량은 더욱 처참하다. 2021 국민독서실태조사의 2019년 대비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전자책=19.0%p △오디오북=4.5%p 증가했지만, 종이책은 11.4%p 감소했다.

  이에 타격을 받은 건 출판업계뿐만이 아니다. 늘 사람이 붐볐던 대형 서점의 속사정 역시 좋지 않다. 작년에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측정한 출판시장 통계에서 4대 대형 서점(△교보문고 △알라딘 △영풍문고 △예스24)의 매출액은 2조 722억 원으로 재작년보다 2.3%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33.3% 줄었다. 급기야 지역 서점은 경영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실시한 출판진흥원의 실태조사는 지역 서점의 1년 전 대비 하루 방문객 수 변화율에 ‘감소(47.5%)’ 항목이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1999년부터 24년간 책을 판매했던 강원 춘천시 광장서적은 결국 이번 달 3일 폐업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책 없는 책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에 지난 6월 개최된 ‘2023 서울국제도서전(이하 도서전)’을 검색해보니, 이를 태그한 게시물은 총 4.2만 개에 달했다. 이 대표는 “평소에 책 독자들을 쉽게 볼 수 없고, 작은 서점에 방문했을 때도 우울한 말을 많이 듣곤 했는데 도서전의 활기는 대단했다”며, 그 많은 이들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아함을 표했다.

  이에 더해 그는 이번 도서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주체 기관에서 다른 형태의 도서 관련 행사를 주최해 독서의 기쁨을 많은 이들이 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대표는 ‘독서 부흥 운동’을 전개해보길 권유했다. “어릴 때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친구들이랑 얘기했던 순간들이 되게 소중했던 것 같아요.” 그가 말한 운동은 대단치 않다. 소규모 모임이더라도 자체적으로 책 읽기 모임을 구성하고 대학 내 학생 휴게소에 책을 배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읽으면 된다.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책이 쌓여있다
​△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책이 쌓여있다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헌책방의 부활

  쓰임을 다한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민 단체 ‘좋은 책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은 전국에 있는 도서관에서 한 해 동안 약 1,000만 권 이상의 책들이 폐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버려지는 서적의 양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언제든지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되살아난다. 거리의 기원은 종로 일가에서부터 시작된다. 1950년대 종로는 중고 서적이 노점식으로 판매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1958년에 이뤄진 청계천 복개 공사로 판매자들은 한순간에 생계를 잃었고, 자연스레 평화시장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남은 책방들 대부분은 청계천과 동대문의 모든 근현대적 발전을 약 60년 동안 함께하고 있다.

  그 역사적인 거리 속에 들어서자, 먼저 책방 앞까지 빼곡하게 쌓여있는 책들이 방문객을 반겼다. 1평 남짓할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헌책을 구입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로 거리가 꽤 활기를 띠었다. 책방에는 아이들이 읽는 아기자기한 만화부터 해외 원서, 종교 서적, 여행 관련 도서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중 해외 원서 및 잡지를 취급하는 책방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원작 동화책인 『제로니모의 환상모험』을 우연히 발견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절판돼 구하기 어려웠던 책이 이 작은 책방에 있다니! 영미판 원서였지만 동심에 홀려 책을 구매했다. 헌책방은 책만 팔지 않는다. 책은 물론, 단돈 5,000원으로 추억까지 선물했다.

  이처럼 우리는 시중에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책을 사거나 최신 개정판이 아닌 구판을 간직하길 원할 때 헌책방에 들른다. 비록 중고지만 헌책방 사장님들의 철저한 검수는 물론 그들만의 특별한 책 손질법을 통해 상태 좋은 책을 일반 서점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살려 서울시는 ‘온라인 헌책방’, ‘청계천 헌책방 거리 책 축제’ 등과 같이 유구한 헌책방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한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2013년에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미래 세대에게 전할 가치가 있는 근현대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허울 좋은 간판에 불과했다. 헌책방 골목의 상권은 갈수록 침체돼 갔다.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 중인 A 씨는 “원래 거리 전체가 전부 헌책방이었지만 점점 사라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골목에서 책을 구매하는 이들이 줄어 대부분의 헌책방은 경영난에 허덕였다. 하지만 임대료 절감과 같은 상권 유지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은 여전히 부재했다.

  다행히도, 약 4년 전부터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옛 추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레트로 열풍’이 일고 있다. 이는 헌책방 골목에 서서히 활력을 불어넣는다. 옛것을 찾는 발걸음들이 매우 반가운 것은 사실이나, 오래도록 책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반짝 지나가는 유행이 아닌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다. 이는 비단 헌책방만의 소원은 아니다. 작가, 인쇄소, 출판사, 서점···, 여전히 한 권의 종이책을 위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억겁의 시간과 구슬땀이 엮이면, 종이책은 비로소 태어난다.

1) 에코 퍼블리시: 출판의 모든 단계에서 친환경성을 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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