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회색인간〉 ​中 ‘소녀와 소년,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교보문고
ⓒ교보문고

  핵전쟁 이후 최후의 인간들이 세운 벽 너머 세상은 소녀와 소년에겐 ‘유토피아’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벽 너머로 향했다. 하지만 둘 중 오직 한 명만 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 끝내 대표가 이끈 선택을 두 기자가 다른 관점으로 바라봤다.

 

허구로 밝혀진 낡은 지성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벽 너머 세상으로 걸어가는 모녀. 소녀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 것을 직감한 어머니는 소녀에게 초코바를 남겨주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고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라”는 조언을 남긴다. 한편 소년 또한 같이 지내온 무리와 벽 너머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모두를 데리고 목적지까지 가기 어렵다고 생각한 소년은 식량을 전부 훔쳐 무리를 이탈해 혼자 벽으로 향한다.

  “이곳은 생존을 위한 계획도시입니다. 현재의 인구도 과합니다.” 겨우 벽에 도달했건만, 반대편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뿐. 벽 너머의 인간들은 소녀와 소년을 관찰하며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한다. 결국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모였다는 이곳의 대표는 소년을 선택한다. 초코바 봉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버린 소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소녀는 쓰레기를 버리기 이전, 극도로 배고픈 상황에서 유일한 식량이었던 초코바를 소년과 나눠 먹었다. 그러나 소년은 달랐다. 그는 소녀와 먹을거리를 나누고 싶지 않아 본인이 가진 콩 통조림을 꺼내지 않았다. 소녀가 소년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은 되려 본인만을 생각한 소년의 이기적인 행동과 확연히 대비된다. 하지만 대표는 오직 단편적인 모습만을 확대해 판단한다.

  대표를 따르는 지도자들 또한 대표의 결정이 현명하다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대표가 소년을 선택한 이유를 말한 직후, 그들 사이에서 잠시 흘렀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도 분명 대표의 결정에 대한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던 건지 모른다. 대표는 아이들을 위해 더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지도자들도 의구심을 품지 못할 선택을 해야 했다.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 대표와, 비판 없는 수용을 했던 어른들. 그들에게 ‘지성인’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박서현 수습기자 seose011@naver.com

원칙, 균형을 잡기 위한 길잡이

  핵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생존자들은 초주검이 되기 마련이다. 모두가 난민으로 전락한 세상에 희망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삭막한 상황에서도 여기 약탈, 폭력, 굶주림이 없는 그야말로 ‘이상향’의 세계가 있다. 한 소녀와 소년이 이를 향해 묵묵히 걷는다.

  이윽고 벽 앞까지 다다른 그들은 하염없이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 안은 그들의 바람과 사뭇 달랐다. 비좁은 터전으로 인구는 과잉 상태였고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는 부모들은 줄줄이 낙태했다. 밖의 상황에 비해 고요했으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고령화로 물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어린아이도 필요했기에 대표는 둘 중 한 명만을 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선택을 앞둔 대표에게 놓인 건 모니터 속 아이들의 모습뿐이다. 그때 소녀는 초코바 쓰레기를 바닥에 버렸고, 이를 본 대표는 소년을 선택했다. 그 하나의 장면에 담긴 사정은 알지 못한 채. 초코바는 소녀의 엄마가 소녀에게 생일 선물로 건넨 것이었다. 먹을 것이 귀한 시대에 더욱 소중한 식량을 소년과 나눈 소녀, 반면 소년은 마지막 남은 식량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모니터는 소녀와 소년의 심성까지 비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대표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오늘날과 달리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이미 기울어진 바닥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지도자는 무엇보다 ‘원칙’을 중시해야 한다. 원칙이란 경사진 바닥을 버텨줄 무게중심, 즉 선택의 갈림길 앞 판단에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대표는 그저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을 뿐이다. 비록 그 원칙이 다소 고지식해 보일지라도, 무너져가는 세상을 살리려면 조금의 가능성도 경시할 수 없었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것들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 큰 파장을 부를 수도 있다. 비록 대표의 결정이 모두를 이해시키긴 어렵지만, 이는 절벽 앞에 놓인 세상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김효주 기자 hyoju0208@naver.com

저작권자 © 동덕여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