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 세계 미술관은 비상사태다. 작년부터 환경단체의 극악무도한 작품 훼손이 사방팔방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작년 11월,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걸린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토마토수프로 덧칠해졌고, 지난 6월에는 모네의 <화가의 지베르니 정원>이 스웨덴 국립박물관에서 페인트칠을 당했다.


  ‘명화 테러’라 불리는 이 행위는 ‘예술 작품이 결코 지구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시위다. 명화 테러를 자행한 영국의 기후환경 운동단체 ‘저스트 스톱 오일(Just Stop Oil)’은 “투표나 청원 등 민주적인 방식을 시도하고 있으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그 결과 탄소 배출량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국제적 인식을 늘려 정부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거세게 행동하는 중이다.


  이를 문제 삼은 대다수는 환경단체의 시위 방식이 ‘과격 시위’라 주장하며 지탄을 보내고 있다.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에 알맞은 수단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공격적인 환경단체는 ‘환경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며, 이들의 행위는 반달리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수많은 권리는 평화롭게만 얻어진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여성이 길거리의 가게와 버킹엄 궁전의 창문을 깨고 물건들을 불태웠다. 당시 이들의 시위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영국의 한 기자는 이들을 비하하고자 참정권을 뜻하는 단어 ‘suffrage’에 여성을 뜻하는 접미사인 ‘-ette’를 붙여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는 멸칭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서프러제트는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여러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현대 사회에서 환경단체의 격렬한 시위 방식을 마냥 옹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대항을 단순히 ‘과격하다’고 치부하며 혀를 차는 것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 여전히 시위대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방법을 고민하고, 정부를 향해 ‘건설적인 담론의 장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쯤 이들이 ‘무뢰한’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먼 미래에 ‘환경 테러리스트’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될 것 같은가.

김다연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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